"금리인하 요구 안할테니 운용의 묘 살려라"…은행권 당혹
올해 5대은행 정책대출 제외 가계대출 뒷걸음…"더 조일 대출도 없는데…"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한지훈 민선희 기자 = 정부의 가계대출 관련 정책과 지침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뒤집히면서 은행권이 혼란을 겪고 있다.
지난달 말만해도 당국 수장들까지 나서서 "대출금리를 낮출 때가 됐다"며 은행권을 압박했지만, 최근 금리 하락과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등으로 집값이 들썩일 조짐을 보이자 이젠 "운용의 묘를 살리라"며 모호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은행 입장에서는 올해 들어 정책대출을 제외한 가계대출이 오히려 뒷걸음친 상태인 터라 대출 문턱을 더 높이기도 곤란한 처지다.
당국 "대출 강화책으로 시장에 메시지"…은행 "최대 위험은 일관성 없는 정책"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7일 금융당국 주재 '가계부채 점검 회의'에서 당국 관계자들은 은행권 참석자들에게 서울 강남 3구 등 주요 지역의 주택거래 건수와 가격 상승 현상이 포착되는 만큼 '매수심리 확산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아울러 "시장 과열 상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대출 규제 조치를 시행해달라"고 협조를 구하면서 "당분간 가계대출 가산금리 인하 요청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발언은 앞서 김병환 금융위원장이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은행권 가계대출 금리 인하 압박과 상충된 것이다.
지난달 24일 김 위원장은 "이제는 대출금리에 기준금리 인하를 반영할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금리 결정이 시장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지 점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원장도 같은 달 25일 "작년 10월 이후 세 차례 인하된 기준금리가 가계·기업 대출금리에 파급된 효과를 면밀히 분석하겠다"고 은행권 가산금리 조사 방침을 내비쳤다.
이번 회의에서는 "은행 자체적으로 운용의 묘를 발휘해 가계부채 관리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당부도 나왔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 메시지가 표면적으로는 가계대출을 풀지 조일지 각 은행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판단하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은행들은 대체로 당국이 일시적으로라도 대출을 억제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 은행이 4월 초 주택담보대출 강화책 실행 계획을 밝히자, 당국 관계자는 "이달 안에 규제를 실행해 시장에 '대출 조이기' 신호를 분명히 전달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가계대출 관리 차원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정책인 것 같다. 올해초 시장금리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이미 대출금리도 하락하는 추세였지만 한 달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당국은 추가 인하를 독촉했다"며 "갑작스러운 서울시의 토허제 완화 결정도 마찬가지고, 제대로 가계대출을 관리하려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일관성부터 복원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5대은행 3월 주택구입용 새 주담대 3조923억원…2월의 절반 이하
이달 가계 대출 현황도 정부의 대출 억제 압박과 잘 맞지 않는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이달 20일 현재 가계대출 잔액은 738조2천833억원으로, 2월 말(736조7천519억원)보다 1조5천314억원 늘었다.
두 달 연속 증가세지만, 증가 폭은 2월(3조931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말까지 영업일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만큼, 가계대출 늘어나는 속도가 2월보다는 다소 주춤한 셈이다.
이달 들어 5대 은행에서 취급된 주택구입용 신규 주택담보대출(3조923억원)도 전월(7조4천878억원)의 절반을 밑돈다. 남은 기간 1월(5조5천765억원) 규모를 넘어설 가능성은 있지만, 2월보다는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 입장에서 더 중요한 지표는 정책대출을 제외한 가계대출 증가율이다. 5대 은행은 지난해 관리 실적 등을 바탕으로 은행별로 올해 1.78∼3.8% 범위에서 가계대출 증가율을 관리하기로 당국과 조율한 상태다.
하지만 올해 들어 이달 20일까지 정책대출을 뺀 가계대출 잔액(635조1천153억원)은 작년 말(640조1천319억원)보다 오히려 5조원 넘게 줄었다. 5대 은행 가운데 이 기준의 가계대출이 조금이라도 늘어난 곳은 KB국민은행이 유일하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최근 내부 가계대출 데이터를 보니, 집을 살 때 내주는 고유 주담대(주택구입용 주담대)가 그렇게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며 "다만 거래가 지금 이뤄졌다고 당장 대출이 되는 것은 아니고 시차가 있으니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고 설명했다.
shk999@yna.co.kr, hanjh@yna.co.kr, ss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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