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를 위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txt]
완주하고 싶은 오티티 콘텐츠 ‘폭싹’
마음을 지켜낸 이들의 이야기
과장된 설정 없이 깊이 스며들어
언젠가부터 오티티(OTT) 시리즈를 시청하다 도중 하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그런 증상을 겪고 있다. 일종의 악순환 때문이다. 티브이(TV), 영화, 유튜브, 오티티 등등 매체도 많아지고 영상 콘텐츠(여기에 웹툰, 웹소설까지 가세)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다 보니 시청자의 역치가 한껏 높아졌다. 무뎌질 대로 무뎌진 시청자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제작자는 설정에 무리수를 두고 1화에 온 힘을 집중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초반은 흥미로운데 중간부터 늘어지거나 무너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업체 쪽에서는 신규 사용자 확보나 기존 사용자의 이용 시간 총합이 중요하니 이런 전략을 고수할지 몰라도 시청자는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사기당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니 가끔 최종회까지 다 보게 되는 시리즈를 만나면 감사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주한 시리즈가 뭐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상황에서, 완주 가능성이 매우 큰 시리즈를 만났다. 넷플릭스의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싹).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스포는 철저하게 막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계속 읽으셔도 된다.
폭싹은 무려 자유당 시절부터 제주도에서 시작된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 그들의 자식들 이야기다. 지금까지 절반 정도가 공개되었고 3월28일에 완결이 날 예정. 새 회차가 풀릴 때마다 공식 오에스티(OST) 음원도 나오고 드라마 중에 흐르는 노래도 쉽게 검색해볼 수 있다. 이와 별도로 폭싹을 위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로 오늘 큐시트를 채워볼까 한다.
첫 곡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부모·자식 관계 중에서 모녀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필연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부터가 일종의 페미니즘 선언이다. 폭싹은 이 지점을 극대화한다. 1964년에 발표된 ‘여자의 일생’은 드라마에서 1960년대를 전후해 엄마가 되는 전광례(엄혜란)와 오애순(아이유, 문소리) 모녀의 주제가로 제격이다. 가사가 너무 절절해 요즘 듣기엔 무척 부담스럽지만, 폭싹을 보는 김에 오랜만에 이미자 선생의 절창을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P4OcwrAoqZk
두번째 곡은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 이 노래는 순정이라는 염기서열을 따로 달고 태어난 남자 주인공 양관식(박보검, 박해준)을 위해 골라봤다. 잔나비의 발라드 계열은 대부분 남자의 순정을 노래한다. 워낙 이런 곡을 잘 쓰는 보컬 최정훈은 목소리와 얼굴 모두 순정남 같아 몰입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잔나비 노래들이 어딘가 도회적인 반면 이 노래는 목가적이다. 밤과 별과 하늘과 시월을 모두 담고 있어 그런가. 아래로는 바다가 출렁이고 위로는 은하수가 흐르는 제주도의 어느 언덕에 앉아 애순을 그리워하는 소년 관식과 잘 어울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pBSyRQYYhMI
세번째 곡은 로드 스튜어트의 ‘영 턱스’(Young Turks)다. 이 노래는 이팔청춘 애순과 관식의 야반도주 배경 음악으로 골라봤다. 노랫말을 보면 1달러만 달랑 들고 가출하는 17살 빌리와 패티의 이야기다. 사랑 하나만 믿고 집을 떠난 후, 패티는 아이를 낳고 빌리는 트럭 운전사가 되어 아내와 아들을 부양한다. 그리고 다른 청춘에게 노래한다. 오늘 밤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라고. 시간은 너희 편이니까 어른들이 너희를 주저앉히고 휘두르고 생각을 바꾸도록 놔두지 말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zQ41hqlV0Kk
아이유와 박보검은 폭싹 홍보차 ‘가요무대’에 출연해 예민의 노래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함께 불렀다. 매우 적절한 선곡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로드 스튜어트의 ‘영 턱스’를 둘이 부르면 어떨지 상상해본다. 영화 ‘그리스’의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턴존이 함께 부르는 ‘서머 나이츠’(Summer Nights) 못지않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FVuGJ4WII
아직 완결이 안 되었는데도 이미 다양한 주제를 훌륭하게 담아낸 폭싹의 중심에는 끝까지 ‘마음’을 지켜낸 연인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심지어 꿈과 부모조차. 서로를 위하는 건지 망치는 건지 헛갈릴 때도 잡은 손만큼은 놓지 않는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으나, 각박한 요즘 이런 동화 하나쯤 있으면 어때? 그리고 현실에서도 어딘가 관식이와 애순이처럼 사는 부부도 있다고 확신한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폭싹이 흔하고 평범한 삶을 주재료로 삼았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물론 박보검과 아이유의 외모는 특별하지만, 드라마 속 인생은 특별하지 않다. 드라마에 묘사된 생활 수준을 보면 오히려 비슷한 세대의 평균보다 더 쪼들리고 고된 삶 같다. 그런데도 그들의 하루하루는 다른 시리즈의 과장된 설정이나 화려한 액션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눈을 잡아두고 있다. 여러모로 좋은 드라마라는 뜻.
“저희 보셨죠? 이 정도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요.”
폭싹의 주인공들이 웃으며 건네는 귤 한조각 같은 위로와 응원이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김성훈 구속영장 기각, 비화폰 수사 ‘암초’…“범죄혐의 다툼 여지”
- 의대생 결국 돌아온다…연세대 절반 이상, 고려대도 상당수 복귀
- ‘헌재에 쫄딱 속았수다’…윤석열 파면 지연에 매일매일 광화문
- 유흥식 추기경 “헌재 더 이상 지체 말라…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 김성훈 구속영장 기각, 비화폰 수사 ‘암초’…“범죄혐의 다툼 여지”
- 야 5당, 한덕수 헌재 선고 앞 “최상목 탄핵” 이유 있었네
- 국힘, 연금개혁안 후폭풍…“내용도 모르고 합의” 당 특위 총사퇴
- [단독] 명태균 “오세훈 유리한 여론조사 부탁했다”고 김한정에 문자
- [단독] 김성훈 경호차장 “윤 대통령 위해 우려 많아” 구속 기각 주장
- 대통령 경호처 직원, 만취해 경찰 폭행…현행범 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