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선 예수 역할도 여성 배우가... 한국은?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 소위 PC주의(Political Correctnes)의 적용은 지난 몇 년간 할리우드 제작 콘텐츠의 화두다.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힘을 발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종과 성별 다양성을 고려한 작품만이 최고상인 작품상 수상 후보로 고려될 수 있다는 기준을 설정한 건 그 대표적 장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지난 2020년 이뤄진 결정에 따라 아카데미 시상식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두 차례 연속 다양성 기준을 적용한 작품들만을 작품상 후보로 올렸다. 영화 속 주요 주제가 혐오의 여지가 없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주연이나 비중 있는 조연이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어야 한다거나 배우 30%를 여성이나 성소수자, 백인이 아닌 인종, 장애인 등으로 기용하거나, 주요 주제를 여성이나 성소수자, 백인이 아닌 인종, 장애에 대한 것으로 설정하거나 하는 기준 중 어느 하나를 충족하는 것 또한 요구된다.
작품 외적으로도 제작이며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비 백인,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단 조건도 붙는다. 이들 중 일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으나 반드시 일정 비율 이상 충족해야만 작품상 후보로 거론될 수 있다. 기획과 시나리오 작성부터 아카데미 수상을 고려해야 하는 창작자들은 투자를 위해서라도 아카데미의 기준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여느 때보다 여성서사 및 성소수자 문제를 주요하게 활용한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로 많이 경합했다는 점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새로운 기준이 효력을 발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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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킹 데드> 스틸컷 |
ⓒ AMC |
물론 잡음도 없지 않다. 숨죽이고는 있으나 반강제적으로 이 같은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과하다는 이야기다. 1750년대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프로미스드 랜드>를 놓고 신설되는 아카데미 작품상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영화에 백인이 아닌 소녀 캐릭터 단 한 명을 배치한 것을 두고도, 실제로는 (실제 존재했다면) 해당 소녀가 당시 덴마크에 있었다면 유일한 비백인이었을 거라며 더 많은 인종을 등장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답한 감독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로마 시대를 다룬 < 글래디에이터 2 >에서 집정관에 오르는 마크리누스를 흑인인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다거나, 디즈니가 <인어공주>의 주인공을 흑인배우 할리 베일리에게, <백설공주> 속 백설공주는 라틴계 레이첼 지글러에게 맡긴 점도 그 영향권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올여름 할리우드에서 공연될 예정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예수 역을 흑인 여성인 신시아 에리보로 낙점해 화제가 됐다. 비판과 반박, 화제 속에서도 할리우드의 PC주의적 흐름은 멈추지 않고 도리어 전진하고 있다.
시리즈 중 최고로 거론되는 시즌
<워킹 데드> 시즌6는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을 돌아보도록 하는 작품이다. 좀비들의 출몰로 국가의 질서가 파괴된 뒤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인 <워킹 데드>다. 가장 남성적이고 폭력적이며 다양성 따윈 서기 어려운 이 장르 가운데 <워킹 데드>는 그 가능성을 치열하게 모색하며 매 걸음을 뗀다.
시즌6는 전체 시리즈 가운데서도 평이 좋은 회차로 구분된다. 주인공인 릭 그라임스(앤드류 링컨 분)와 그의 무리에게 이제껏 닥친 어느 위험보다도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 동시에, 전체 시리즈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악역 네건(제프리 딘 모건 분)이 등장하는 시즌이기 때문일 테다. 위협을 물리치고 무리의 결속을 다졌지만 곧장 더욱 큰 위기를 맞이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시즌을 거듭하며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충분하다.
시즌6는 떠돌던 릭의 일행이 드디어 안전한 장벽으로 보호받는 마을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해 그들과 하나가 된 뒤의 이야기다. 마을을 침탈한 떠돌이 집단 울브스의 공격을 물리친 이들은 인근을 떠도는 수많은 좀비를 유인해 마을 바깥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전멸할 수 있는 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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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킹 데드> 스틸컷 |
ⓒ AMC |
긴박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지난 시즌에 대한 평에서 적었듯 여성 캐릭터에 대한 활용이다. 주인공의 무리는 물론이고, 이들 바깥의 무리에서조차 여성의 활약이 주요하게 다뤄지는 건 단연 인상적이다.
등장하는 무리의 절반 이상을 여성 지도자가 이끌고, 물리적으로도 남성 못지않은 전투력을 가진 여성들이 수두룩하다. 남성들도 버거워하는 좀비와의 전투에서 여성들의 대단한 활약은 실상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그를 자연스레 연출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여 그를 매끄럽게 보이도록 애를 쓴다. 그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이 감안하고 넘어갈 정도는 된다.
시즌6에선 다양성에 대한 노출이 보다 본격화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지난 시즌들에서 레즈비언인 게 드러났던 타라 챔블러(알라나 마스터슨 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연애를 시작한다. 마을 유일한 의사인 드니스 클로이드(메릿 위버 분)다. 정신과 전문의로 피를 보고 환자의 생사를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 공포감이 있던 그녀가 타라와 유대를 갖고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좀비물 속 이색적인 로맨스를 이룬다.
한편으로 이는 예고된 로맨스처럼도 보이는데, 지난 시즌에서 처음 등장한 애론(로스 마퀸드 분)과 에릭(조던 우즈-로빈슨 분) 커플이 남남, 즉 게이였던 때문이다. 드라마는 이들이 남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당한 공을 들여 부각하는데, 시즌6에선 애론 뿐 아니라 레즈비언인 타라와 드니스의 로맨스까지 상당한 분량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PC주의며 소수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뿐인가. 주인공인 릭은 이번 시즌에서 미숀(다나이 구리라 분)과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좀처럼 무리와 섞이지 않는 외로운 칼잡이였던 그녀가 릭과 연애에 이르게 되는 설정은 '그냥 그렇게 됐다'는 대사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된 서사와는 별 관련도 의미도 없는 뜬금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PC주의적으로 보자면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미숀이 흑인이고 릭이 백인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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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킹 데드> 스틸컷 |
ⓒ AMC |
현실의 반영을 넘어 현실을 상회하는 노출을 확고한 방향으로 설정한 할리우드 콘텐츠 제작 경향은 한국의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이 한국사회의 한 축으로 뿌리내린 오늘까지 한국의 주요 콘텐츠 가운데선 그들의 자리를 그만큼 확인할 길 없다. 사거리 광장을 점령한 극우 및 수구 세력에 의해 공공연한 혐오와 마주하는 소수자들, 또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은 더욱 그렇다. 이따금 작품 가운데 이들이 등장할 때도 틀에 박힌 캐릭터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한국이 할리우드의 PC주의적 경향을 소비하는 행태 또한 마찬가지다. 실제 통계보다 과잉된 노출을 장려하고, 심지어는 기계적으로 수상기준을 설정하며 강제하는 일련의 정책이 반감을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 적잖은 작품이 그 기획 단계에서부터 무리하게 이와 같은 경향을 작품에 반영하려 들고, 그 결정이 도리어 작품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인어공주며 백설공주의 캐스팅을 두고 쏟아지는 비판은 이와 같은 사례와 얽혀서는 십자포화를 맞는다. 한국 대중이 이 경향을 소비하는 방식이 이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대로 좋은가. 한국 콘텐츠 속에서 우리 안의 소수자며 다양성을 어떻게 노출하고 있는지를, 그 영향은 또 어떠한지를 우리는 제대로 고려한 적이 있는가. 기계적이고 강제적일지라도 실제보다 훨씬 상회하는 소수자를 노출하기로 결정한 할리우드의 경향이 어떤 가치를 위함인지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있는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일 뿐인 <워킹 데드> 시즌6가 제 완성도를 일부 훼손하면서까지 감행하는 다양성의 적극적인 노출을 그저 폄훼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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