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조선의 美함정 수리 6개월... 도면 없이 뒤틀린 방향타 등 수백 곳 손봐
작년 9월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조선소로 선체 약 210m짜리 4만t급 함정이 들어왔다. 곳곳에 잔뜩 녹이 슨 이 배는 2009년 3월 샌디에이고의 나스코(NASSCO) 조선소에서 진수된 미 해군의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호다. 탄약, 식량, 부품 등을 전투함 등 다른 함정에 보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까지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작전에 참여해오다, 유지·보수 및 정비(MRO)를 받으러 이날 입항한 것이다.
그 후 6개월, 13일 오전 9시 월리 시라 호는 말끔한 외관을 한 새 함정 같은 모습으로 거제를 떠났다. 미 해군 해상 수송 사령부의 패트릭 무어 대장은 “이번 성공적인 MRO는 긴밀한 한미 협력의 증거이고 앞으로 협력 관계를 더 강화할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 해군이 MRO를 한국에 맡긴 것은 이 배가 처음이었다. 한화오션이 이 사업을 따냈을 당시 국내에선 반향이 컸다. 극비 군사작전에 여러번 투입됐던 함정을 맡길 정도로 미국이 한미 동맹과 우리 조선소의 기술력을 신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 등 새로 출범한 미 정부 인사들이 잇따라 한국과의 조선업 협력을 강조하고 있어, 미군 함정이 우리 조선소에서 ‘재탄생’하는 모습은 앞으로 더 이어질 전망이다.
◇도면 없이 방향타·중심축 고쳐
이 배를 진수할 때 미 해군은 우주 비행사 월리 시라(1923~2007년)를 기리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그는 미 해군 소속 비행사로 우주를 3번 다녀왔고, 한국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인연도 있다. 하지만 정비는 난관이 많았다.
13일 한화오션 등에 따르면 작년 9월 입항한 이 배를 검사했을 때 외관만으로도 부식된 부분만 약 260군데에 달했다. 보안상 공개할 수 없는 주요 장비를 점검·교체하거나 운항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등 수백 곳을 손봤다.
더 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검사 과정에서 미 해군이 생각했던 것보다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더 발견된 것이다. 대표적인 게 선체 바닥 뒤편에 있는 방향타였다. 배를 독(dock)에 들여 바닥을 살펴보니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방향타가 망가져 있었다. 엔진과 프로펠러를 잇는 중심 축도 크게 뒤틀려 있었다. 당시 조선소 엔지니어들은 이 배가 중동 중심으로 작전을 해온 터라 그간 적절한 조선소를 찾지 못해 제대로 유지·보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한화오션 측은 이런 점들을 발견해 미 해군 측에 알리고 추가 보수를 제안했다. 미군 입장에선 원래 3개월이던 MRO 기간이 2배인 6개월로 늘어나고 비용도 늘어나는 상황이었지만 흔쾌히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해군 측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제안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더 신뢰가 쌓이는 걸 느꼈다”면서 “MRO 범위가 넓어지면서 공개할 순 없지만 전체 매출도 올랐다”고 했다.
특히 이런 작업을 도면도 없이 해야 했다. 보안 등을 감안하면 도면을 찾아서 국내로 가져오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오랜 선박 설계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을 투입해 자체적으로 내부 구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주요 부위를 고쳤다. 또 일부 부품은 함정을 처음 만들 때 썼던 미국산 대신, 같은 품질의 한국산으로 대체도 했다. 수입해 오는 시간도 아끼고 국산화로 협력사에 도움을 준다는 취지였다.
◇추가 수주 기대감 커진다
조선 업계에서는 추가 수주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해군이 중국의 추격 속에서 전력 강화에 나서고 있어서다.
미국은 국내에서 운항하는 민간 선박, 군함은 자국 내에서만 건조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조선소들은 안정된 일감을 바탕으로 기술 개발이나 투자를 소홀히 해 노후화하고 생산성도 떨어졌다. 반면 미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은 최근 10여 년간 빠르게 배를 만드는 역량을 강화하며 해군력을 키웠다. 특히 함정 수에서 2020년 350척으로 미국(293척)을 앞질렀다. 기술 수준까지 감안하면 전체 해군력은 미국이 더 앞서고 있지만 물량 공세가 거센 상황이다.
여기에 맞서느라 미국은 전력 강화가 시급한데 자국 조선소에는 MRO를 맡겨도 정비가 지연되기 일쑤라, 동맹국에 물량을 더 많이 넘기기 시작한 상황이다. 특히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업 경쟁력을 갖춘 동맹국은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특히 조선 업계에선 지난달 미 상원이 미 해군·해안경비대 함정 건조를 외국 조선소에서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을 발의한 것에도 주목한다. 신규 함정 건조 계약도 따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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