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깨어났다…트럼프가 촉발한 ‘자주국방’ 각성[딥다이브]
수렁, 쇠락, 침몰. 한동안 독일 경제엔 이런 단어가 따라붙었죠. 2년 연속 경기침체에 빠진 데다, 다시 성장 궤도를 타기 위한 구조 개혁도 지지부진했기 때문인데요. ‘유럽의 병자’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독일이 갑자기 깨어났습니다. 16년 만에 헌법을 개정해 대대적인 국방·인프라 투자에 나서겠다며 정치권이 팔을 걷어붙였죠. 이게 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나비효과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독일의 각성을 들여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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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를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
“전후 독일 역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다.”(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빈 윙클러)
“완전한 게임체인저.”(뒤셀도르프대학 옌스 쥐데쿰 교수)
“독일이 성장의 물꼬를 트고 있다.”(JP모건애셋매니지먼트 카렌 워드 전략가)
독일의 차기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가 4일 발표한 헌법(기본법) 개정 합의안에 대한 평가입니다. 합의안 골자는 정부의 차입 한도를 규정한 ‘부채 브레이크’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하는 것. 즉 재정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국방비를 무제한 확장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겁니다. 이와 함께 5000억 유로(778조원)의 인프라 투자기금 설립, 주정부에 대한 부채 규칙 완화도 담겼죠. 한마디로 독일이 천문학적인 국방·인프라 투자로 나아가기 위한 문을 활짝 열기로 한 겁니다.
주식시장은 환호했고요(독일 DAX지수 5일 3.3% 상승). 채권시장에선 독일 정부가 국채 발행에 뛰어들 거란 기대감으로 독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1997년 이후 가장 많이(0.31%포인트) 급등했습니다.
부채 브레이크를 이제 좀 풀자는 논의는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다당제 정치 지형에선 어떤 개혁도 불가능해 보였죠.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기 위한 설득과 합의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함정이랄까요. 사실 메르츠 차기 총리 역시 2월 23일 연방 선거 전엔 부채 브레이크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180도 입장을 바꿔서 갑자기 역사적인 합의에 이를 줄이야.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의석수 3분의 2 이상 찬성에 이르려면 녹색당까지 추가로 끌어들여야 하지만, 아마도 가능할 거란 관측이 나오죠.
결정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였을까요. 이게 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덕분입니다. 유럽 외교관계위원회의 수석 정책 펠로우인 야나 푸글리에린은 FT에 이렇게 말했죠. “메르츠 차기 총리는 독일과 유럽에 대한 절대적인 비상 상황을 실제로 봤기 때문에 그렇게 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최근 몇 주 동안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메르츠 차기 총리는 이번 합의안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대륙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위협을 고려할 때, 이제 우리의 방어 규칙은 ‘무엇이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많던 전차는 어디로?
평화배당금. 냉전이 끝나고 국방비를 줄여 생긴 여유 예산을 마치 배당금처럼 쓰는 걸 뜻합니다. 독일은 역시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방비 지출을 크게 줄여왔고요. 이로 인해 생겨난 평화 배당금은 거대한 복지국가 건설에 쓰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 최대이자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군사력은 수십 년에 걸쳐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주요 무기 현황이죠. 냉전 직후인 1992년 이후 독일군이 보유한 주요 무기 수는 아래 그래프처럼 급속히 줄었습니다. 그래프에선 생략했지만 전투기(1992년 553→2021년 226대), 단거리 방공시스템(680→12개)도 급감했죠.
물론 독일 국방비 지출은 2024년 GDP의 2.1% 수준까지 늘어났습니다. 이전 30년 넘게 줄곧 1%대였고, 상당 기간 1%대 초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죠. 헌법이 정한 엄격한 재정적자 제한 때문에 이 정도 하기도 쉽진 않았는데요. 하지만 미국은 물론 다른 유럽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원국에 ‘GDP 5%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고요.
이런 분위기 덕분에 지금 유럽 방산주 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프랑스 탈레스, 영국 BAE시스템스, 독일 헨솔트와 티센크루프 등이 모두 올해 들어 주가가 급등했고요. 특히 독일 최대 방위사업체로 대포·장갑차·탄약 제조에 특화된 라인메탈(Rheinmetall) 주가상승이 눈에 띄는데요. 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9%. 지난해 11월 트럼프 당선 이후로는 150%나 올랐습니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과 비교하면 무려 1250% 상승.
라인메탈 CEO 아민 파퍼거는 지난달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대합니다. “트럼프는 미국이 유럽 안보를 다룰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는 (다른 방산기업을) 인수하고, 막대한 투자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징병제 부활?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독일이 달라졌습니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제 빚을 왕창 내서라도 무기를 사서 채워넣기로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까지 버릴 수 있단 두려움이 분열된 정치권을 하나로 통합시킨 덕분이죠. 자, 그럼 혹시 이것도 가능할까요? 징병제 부활.
독일은 2011년 군대 징집을 중단했죠. 더 이상 대규모 군대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블록 간 대립은 끝났고, 다시 재현될 조짐도 없다고 본 거죠. 이미 서방에선 징병제가 옛 유물이 되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미국은 1973년 일찌감치 모병제로 전환했고 대부분 나토 국가도 1990년대엔 징병제를 없앴으니까요.
현재 독일군은 약 18만명. 냉전 시기 정점(약 49.5만명)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독일 연방방위군 사령관 카르스텐 브로이어는 현재 독일군 인력이 최소 10만명 부족하고, 제대로 된 군대가 되려면 46만명이 돼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독일의 징병제 부활을 두고는 “청소년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반대론(중도우파 ‘자유민주당’)부터 ‘2년 의무복무’ 주장(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까지,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재정 규칙보다 오히려 합의에 이르기가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죠.
어쨌든 잊혀졌던 징병제까지 이토록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됐다는 건 그만큼 국방이 독일의 중요한 실존적 문제로 떠올랐다는 뜻입니다. 평화배당금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데요. 그동안 복지국가를 떠받쳐놨던 평화배당금이 이렇게 사라지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어디로 향해 갈까요. FT 칼럼니스트 자난 가네쉬의 답은 간단합니다. “유럽은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축소하고 전쟁국가(warfare state)를 건설해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개혁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사회지출에 대한 삭감이 본격화될 겁니다. 그렇게 독일은 깨어날 거고, 어쩌면 그 산업적인 힘과 GDP 성장, 강력한 군대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죠. 그리고 이 변화를 촉발한 주인공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을지도. By.딥다이브
유럽의 병자인 줄 알았던 독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릴 준비를 합니다. 과연 다시 한창때처럼 그렇게 뛸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독일이 국방비의 무제한 차입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합니다. 독일의 재정 확장을 가로막던 ‘부채 브레이크’를 풀겠다는 겁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안보 불안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 정치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금융시장은 환호합니다.
-냉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독일 군사력은 쪼그라들었습니다. 모든 무기가 부족한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기고가 빠르게 비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메우려면 국방 지출을 대거 늘려야 합니다. 라인메탈을 비롯한 유럽 방위산업 기업엔 큰 호재입니다.
-독일은 14년 전 중단한 징병제도 부활시킬까요. 이를 둘러싼 논의는 점점 활발해집니다. 평화배당금 시대는 끝났고, 복지지출 삭감은 불가피합니다. 더 적은 복지와 더 많은 국방비의 새로운 시대가 찾아옵니다. 역사적인 전환점이죠.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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