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1. 금학산: 강원도 최북단의 산에서 시작하는 을사년 새해

장보영 2025. 1. 2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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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운 깃든 새해 문턱, 당신은 어떤 소망을 품었나요?
학이 내려앉은 듯… 금학산 이름 붙여져
조선 후기 고지도 ‘해동지도’ 기록 확인
철원 대표 명산, 해발 947m 높은 산세
동송버스터미널 ~산 들머리까지 약 1㎞
정승바위 대면 뒤 2시간 후 정상 조우
방공호 등 6·25전쟁 격전지 흔적 남아
오랫동안 북쪽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철원 금학산 정상에서. 경계가 모호한 산 능선 너머의 북녘을 상상한다.

2025년 새해도 벌써 한 달을 채워갑니다. 새해의 초입에서 다짐한 일들은 순항 중인가요? 굳게 마음먹었으면서 그 새를 못 참고 잊고 살아가는 어떤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면 이 인사가 조금은 유용할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에서 중요한 일들, 놓치고 나면 후회할 일들, 도모하고자 했던 크고 작은 도전을 우선순위에 올려놓는 올해가 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이 말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덩어리가 된 시간 속에서 오늘도 휘몰아치듯 달려갑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대통령 탄핵 시위부터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을 사건사고와 함께 그 어느 해보다 어수선하게 흘러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불행을 막을 방도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붙잡지 않는 것. 첫 번째 화살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더 나은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해의 기백을 다지고자 제가 야심 차게 향한 곳은 철원입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최북단 지역. 꽤 오래전부터 철원에 가고 싶었으나 가는 길이 멀었습니다. 제가 지내는 원주에서 철원까지 한 번에 가는 시외버스가 없었기에 피치 못하게 서울로 우회해야 했는데 서울에서도 철원까지 또 2시간 거리인지라 작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기로 하고 방법을 찾아보니 의외로 철원까지 가는 차편이 잦아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 살던 고향 인제에서 지척에 있던 철원까지 자주 찾아갔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금학산 매바위. 시야에는 어느덧 철원평야가 가득 들어찬다.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풍경이다

이른 아침, 겨울 산행 채비를 하고 집을 벗어나 동서울버스터미널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철원으로 향합니다. 목적지는 철원 동송버스터미널입니다. 땅이 넓은 철원은 무려 4개의 터미널을 두고 있기에 가고자 하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수히 많은 산을 두르고 있는 철원에서 이번에 가는 산은 동송읍 이평리에 있는 금학산입니다. 동서울버스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강변북로를 지나 세종포천고속도로를 타고 구리, 의정부, 양주, 포천 등 경기 북부의 도시를 지나갑니다.

정오에 조금 못 미쳐 철원에 도착합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어느덧 해가 중천입니다. 다행히 터미널에서 금학산 들머리까지는 1㎞ 정도로 가깝습니다. 물, 산에서 먹을 김밥 등을 보충하고 금학산 쪽으로 천천히 이동합니다. 웅장한 산세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새로운 산 앞에서는 언제나 긴장됩니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 신작로를 건너 철원여자중·고등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계속해서 직진하니 금학체육공원이 나타납니다. 금학산 산행은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금학산 정상. 너른 정상에는 헬기장과 군부대 초소가 있다. 

금학산은 철원을 대표하는 명산입니다. 해발 947m로 높은 산세를 자랑하지요. 마치 학의 형상을 하고 있어 금학산(金鶴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등산로 입구의 산행안내도에서 살펴보는 금학산 가는 길은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가파릅니다. 정상까지 꼬박 3㎞의 오르막을 올라가야 하지요. 금학체육공원에서 출발해 200m쯤 지나니 사거리 임도가 나타납니다. 정상은 이 길에서 직진합니다. 자칫 임도로 길을 잘못 들면 한참을 어디로 빠질지 모르니 집중해야 합니다. 사거리의 산행 안내도가 한 번 더 친절하게 길을 알려줍니다. 산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날이 조금 풀려 걱정했던 만큼 춥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녹지 않은 잔설과 얼어붙은 바위에 대한 주의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북쪽의 서늘한 그늘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 있네요. 학이 내려앉은 듯한 산형임을 기억할 때 지금 제가 오르는 이평리의 산길은 학의 왼쪽 날개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너머 마을인 오지리의 산길은 오른쪽 날개일까요? 이 묘사는 난데없는 공상이 아니라 조선 후기 고지도인 ‘해동지도’에 기록된 글입니다. 학의 머리로 향하는 고되고 지루한 길에 이러한 그림은 도움이 됩니다.

금학체육공원 약수터의 겨울 풍경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만큼 산길 곳곳에 적군을 공격하거나 적군의 공습으로부터 피하고자 만든 진지와 벙커, 방공호 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7년 전 여름 고대산을 오를 때도 이러한 전쟁의 잔해를 봤습니다. 고대산은 금학산과 이어지는 산이고 두 산을 사이에 두고 연천과 철원이 갈라집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낡아버린 진지와 벙커, 방공호를 보니 마치 폐허가 된 고대의 도시를 지나는 기분입니다. 오늘 산행 시간이 넉넉하면 고대산까지 연계해도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합니다. 출발한 지 2㎞쯤 오르자 매를 닮았다는 매바위에 이르고, 어느덧 시야에는 철원평야가 가득 들어찹니다.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풍경. 이곳까지 올라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풍경 앞에 서니 숨이 쉬어집니다. 동송읍 일원이 한눈에 가득 담기고 저 너머로 얼어붙은 논밭과 이름 모를 저수지가 펼쳐집니다. 아무래도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는 쪽은 북쪽입니다. 이곳에 서 있으니 조금씩 거리감을 잃어버립니다. 이념, 사상…. 그런 것의 실체가 무엇일까.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저곳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 해발 947m를 알리는     금학산 정상석

정승바위와 대면한 뒤 출발한 지 2시간 후에 금학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헬기장 근처 조망터에는 후대의 국운을 염원하는 궁예의 캐릭터 조형물이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금학산 정상석이 단단하게 자리를 지킵니다. 정상 인근의 군부대 초소에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거기 누구 없냐고 불러봤으나 들리지 않는지 빈 바람만 돌아옵니다. 해무가 끼어 경계가 모호한 사방의 산 능선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그 순간 창공 위로 두 마리 새가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하늘도 하나이고 산줄기도 하나입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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