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법에 과잉 의존하는 민주주의

2024. 9. 1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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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학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법이 만들어질까? 국회미래연구원에서 연구지원 업무를 맡았던 이종혁·김자연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21대 우리 국회를 기준으로 같은 기간 미국 의회는 709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독일은 473건, 일본은 377건, 프랑스는 243건, 영국은 139건의 법안을 법률로 성립시켰다.

우리 국회는 어떨까? 9063건이었다. 다섯 나라의 입법 실적을 다 합해도 1941건인데, 이의 4.7배나 된다. 입법 실적으로 보면 우리 국회는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입법부다.

8월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7회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간호법이 재적 300인, 재석 290인 중 찬성 283인, 반대 2인, 기권 5인으로 통과되고 있다. 뉴스1

「 너무 많이 법 만드는 우리 국회
모두가 법으로 싸우고 적대해
시민들도 법에 호소하고 의존
자율적 규범과 문화 가꿔 가야

나라마다 의원 수가 다르므로 의원 1인당으로 환산하면 우리 국회의원들은 의회중심제 국가인 영국, 일본, 독일 의회보다 각각 152배, 61배, 51배나 더 많은 법안을 법률에 반영시키고 있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보다 23배, 프랑스보다는 76배나 입법 성과가 좋다. 입법 실적을 백만분율(인구 100만 명당 입법 빈도)로 계산해보면, 한국은 176.0으로 독일의 5.7, 프랑스의 3.7, 일본의 3.1, 미국의 2.1, 영국의 2.0 보다 월등히 높다. 이들 나라 평균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53배나 더 많은 입법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혹자는 법안의 과잉발의를 부추기는 ‘대안반영폐기’ 제도를 예로 들면서 우리 국회의 입법 성과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대안반영폐기’된 법안이란 “위원회의 법률안 심사결과 그 법률안의 내용을 일부 또는 전부 반영한 ‘위원회 대안’을 제안하는 대신,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한 법률안”을 뜻한다.

예컨대 같은 이름의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된 경우 각각의 법안을 병합 심사해 1건의 ‘위원회 대안’으로 만들어 본회의에 제안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는 위원회가 심사 기능을 발휘하는 정상적인 과정이자, 입법 효율성을 위해서도 꼭 있어야 할 절차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된 뒤 발언을 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9건을 반영한 대안으로, 8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되었다. 뉴시스

문제는 그 ‘위원회 대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되면 ‘대안반영폐기’된 법안도 ‘법률반영’ 실적으로 기록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이 있다. 가장 큰 부작용은 ‘대안반영폐기’ 제도를 악용해 같은 이름의 법안을 남발하는 입법 기술자가 양산되는 데 있다.

전체 ‘법률반영’에서 ‘대안반영’ 법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21대 국회에서 법률에 반영된 전체 법안 9063건 가운데 5883건(64.9%)이 ‘대안반영’이었다. ‘대안반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낮았던 때는 14대 국회였다. 그때 9.9%였던 것이 21.3%(15대), 40.2%(16대), 49.2%(17대), 61.9%(18대), 62.4%(19대), 63.2%(20대), 64.9%(21대)로 늘었다. ‘원안 가결’과 ‘수정 가결’이 주를 이루던 우리 국회의 입법환경이 급변한 것이다.

말 많은 이 ‘대안반영폐기’ 법안을 제외하고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 국회의 본회의 통과 법안 수는 다른 나라와 비슷해질까? 그것도 아니다. 원안 가결과 수정 가결된 법안만 따로 떼서 봐도 우리 국회의 법안 성과는 여전히 놀랍다. 21대 국회를 기준으로 보면 2959건이다. ‘대안반영폐기’가 된 법안을 빼고도 같은 기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에서 가결된 법안을 합친 것(1941건)보다 많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국회는 법을 바꾸려는 열정으로 뜨겁다. 22대 국회 100일 만에 이미 3974건의 개정 법안을 발의했을 정도다.

서울 서초구 법원 청사 앞으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법에 호소하는 시민들의 규모도 놀랍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으로 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는 616만7000여 건에 이른다. 우리보다 인구가 2.4배 많은 일본의 337만5000여 건의 거의 두 배다. ‘대검찰청 형사사건 동향’에 따르면 2023년의 고소·고발 사건 수는 33만1000여 건으로, 인구 대비로 보면 일본의 50배에 달한다.

의원들은 법을 열심히 만들고 시민들은 열심히 법에 호소한다. 법률가들도 열심히 일한다. 2023년 법관 1인당 본안사건 처리 건수는 일본의 2배, 독일의 4배로 보고되고 있다. 모두가 법으로 일하고 법에 의존하는 데 우리 서로 간의 갈등과 적대는 줄어들 줄 모른다. 국회도 사법부도 시민도 모두 법으로 싸우고 법으로 맞서는 형국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책 『국가』에서 법을 바꿔 일하는 것은 히드라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정치학』에서 법을 쉽게 바꾸면 법의 힘은 약해진다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법을 바꿔 일하고 법으로 싸우게 되었는지, 과연 법은 마땅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볼 때다.

국회는 꼭 필요한 법을 좀 더 신중하게 만들고, 시민은 법이 아니고도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규범과 문화를 가꿔갈 수 있어야 좋은 사회다. 정치의 갈등 조정 기능은 줄고 법만 양산되는 민주주의, 정치가가 아닌 법률가들이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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