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자식 자랑’ 스티커
소설가 한수산은 70년대 한국 문단의 아이콘이었다. 데뷔는 신춘문예 당선작 ‘4월의 끝’이었는데, 작품 속 대학생 주인공이 국민학교 6학년 여자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쉬는 시간에 라디오 광고가 들린다. “두통 치통 생리통에 사리돈 한 알”. 그러자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생리통은 뭔지 모르겠어요.” 주인공은 얼결에 “언니한테 물어봐” 해버렸다. 아이가 아래층에 내려간 잠시 뒤 “뭐 저 따위 가정교사가 다 있어” 하는 비명이 들린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해가 1972년이다. 소설은 이어진다. ‘결국 나는 후임 여학생의 가슴에서 OX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국립 서울대학교의 배지가 빛나는 것을 보면서 하야해야만 했다.’ 작가는 대학 상징 엠블럼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나는 그 집을 빠져 나오며 저 학생은 아마도 가슴의 배지처럼 모든 문제에 선명하게 O나 X를 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요즘 작가라면 망설일 대목이 없지 않겠지만 당시 독자들에겐 유쾌했다.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쓰인 서울대 배지는 OX를 겹쳐 놓은 듯 보인다. 공부의 정답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살이의 정답에는 벽창호일 것 같은 인상 때문에 자주 희롱의 대상이 됐다. 이런 사연은 대학마다 다 있을 것이다. 대학마다 배지와 로고는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상징으로 굳어져 널리 퍼졌고, 근년 들어 다양한 디자인의 스티커로 제작돼 홍보용으로 보급되거나 굿즈로 팔리기도 한다.
▶어제 신문에 ‘서울대 자식 자랑 스티커’ 기사가 실렸다. 기부금을 모은 곳에서 발급하는 이 차량 스티커는 영어로 돼 있는데, ‘(서울대) 자랑 가족’ ‘(서울대) 자랑 부모’ ‘난 (서울대) 엄마야’ ‘난 (서울대) 아빠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기사 반응이 다양하다. “웬 선민의식이냐” “좀 과한 것 아니냐”도 있고, “불법도 아닌데 왜 난리냐” “자기만족 좀 하자는데 뭐가 문제냐”도 있다. 그러나 대학 로고는 저작권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상징 로고를 새긴 스티커나 굿즈가 엄청 유통된다. 수익 또한 만만찮다. 이젠 ‘하버드’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서 그 학교 학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연세대 ‘독수리’ 문양을 새겼든, 고려대 ‘호랑이’가 입 벌리고 있든, ‘OX’ 배지 위에 ‘내가 엄마야’라고 썼든, 몇 천 원에서 몇 만 원쯤 하는 굿즈의 가격이 아니라, 중한 것은 기부금이다. 대학 재정이 고갈되고 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는지 따질 겨를이 없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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