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장애인 희화화 논란.. 안무 바뀔까
발레 팬 이 모 씨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6월 15~20일 공연 예정인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속 일부 장면이 장애인을 비하하고 희화화했다고 진정을 넣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의 엄마인 이 씨는 또 장애인 단체 등에도 공공 기관인 국립발레단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국립발레단이 2015년 레퍼토리로 만들어 올해 대한민국레축제에서 다시 선보이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손꼽히는 희극 발레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 원작으로 이탈리아 파두아의 부자 밥티스타의 말괄량이 큰딸 카테리나와 얌전한 둘째 딸 비앙카의 결혼 소동을 다뤘다. ‘드라마 발레의 거장’ 존 크랑코가 196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동명 희곡을 2막 발레로 만든 이후 여러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채택돼 있다.
최근 발레 커뮤니티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2막 1장이다. 카테리나와 결혼한 페트루키오는 집에 돌아온 후 아내를 길들이기 위해 밥을 굶긴다. 이때 페트루키오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으로 카테리나를 괴롭히는데, 뇌성마비나 뇌 병변 환자 등 지체장애인의 흉내를 내고 있다. 원작에선 하인들이 페트루키오의 명령으로 음식을 들고 왔다 치울 뿐이지만 크랑코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2분이 채 안 되는 길이이며 그동안 논란이 됐던 적 없지만 최근 예술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해지면서 이번에 국내에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앞서 2016년 영국 버밍엄 로열 발레단이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을 맞아 이 작품을 공연했을 때 장애를 희화화했다는 비판이 들어간 리뷰가 하나 나온 적 있지만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크랑코의 3대 드라마 발레 가운데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오네긴’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투어에 그동안 이 작품이 많이 포함되지 않았던 데다 2000년대 이후 라이선스를 허가해서다. 그래서 작품 속 장애인 희화화 문제가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동안 페트루키오가 카테리나를 상당히 가학적으로 굴복시키는 내용 때문에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비하면 여성혐오를 담은 불편한 대사들이 빠진 발레는 코미디로서 재미가 극대화됐다는 평가가 많다.
이 씨를 비롯해 일부 발레 팬들은 국립발레단에 장애인 희화화 문제를 제기한 상태다. 이에 대해 국립발레단은 크랑코 안무의 저작권을 가진 ‘존 크랑코 재단’(John Cranko Gesellschaft e. V.)에 최근 논란을 전하면서 해당 장면의 안무 수정 가능 여부를 문의한 상태다. 국립발레단 관계자는 “크랑코가 안무하던 시절에는 인권의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관객 눈높이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강수진 단장님이 크랑코 재단 측과 안무 수정 여부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재단 측에서 어떤 결론을 낼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발레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수정을 가한 사례로는 최근 여러 발레단이 문제의식 없이 행하던 블랙 및 옐로 페이스를 없앤 것이 꼽힌다. 블랙 페이스는 백인이 얼굴을 검게 칠해서 흑인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하고, 옐로 페이스는 백인 얼굴을 누렇게 칠하거나 눈을 째지게 표현한 것을 말한다. 클래식 발레 ‘라바야데르’의 흑인 노예와 ‘호두까기인형’의 중국 인형이 대표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블랙 페이스는 흑인 인권과 함께 예전부터 지적됐지만 지난 2019년 12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서 흑인으로는 처음 수석 발레리나가 된 미스티 코플랜드가 볼쇼이 발레단의 ‘라바야데르’ 속 흑인 분장은 사진과 함께 인종 차별이라는 트윗을 올리면서 전 세계 발레계를 달궜다. 당시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흑인 무용수가 없는 우리 발레단에서 흑인 분장을 하는 것은 정상이다. 이것은 예술이며 이상한 것은 없다”고 맞섰다. 또 볼쇼이 발레단 측도 계속해서 흑인 분장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블랙 페이스 논란의 후폭풍은 컸다. 당시 호주 발레단은 ‘호두까기 인형’의 옐로 페이스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자 서양 무용수를 과장되게 분장시키는 대신 동양인 무용수를 출연시키는 것으로 바로 수정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는 지난해 발레의 다양성 논의를 거쳐 지난 2월 블랙 페이스를 금지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국립발레단이 ‘라바야데르’를 올리면서 흑인 분장을 뺐다.
발레계에서 인종 등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서도 발레리나의 피부색과 관련한 논란이 일었다. 다만 이번에는 블랙 페이스와 정반대 사례로 흑인 무용수가 “발레는 하얗다”는 고정관념에 맞섰다. 베를린 슈타츠발레의 첫 흑인 발레리나인 클로에 로페스 고메스가 ‘백조의 호수’ 공연 때 피부색을 감추기 위해 하얗게 분장을 시키는 것을 거절한 뒤 “발레단과 맞지 않는다”며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지난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 4월 1심 판결에서 고메스는 1만6000 유로(22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으며, 베를린 슈타츠발레는 차별을 없애고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워크숍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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