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고구려 (1) - 신성 함락
[고구려사 명장면-120] 666년 5월 남생이 아들 헌성을 당의 조정에 인질로 보냄으로써 당의 조정도 비로소 남생의 투항이 진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고 있던 당 고종은 희색이 만연했다.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고구려 내부 국내성에 고립돼 있던 남생을 구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666년 6월에 부랴부랴 원정군을 편성하여 글필하력(契苾何力)을 사령관으로 삼고 방동선(龐同善)과 영주도독(營州都督) 고간을 좌우로 삼아 보좌하게 하고, 설인귀와 이근행(李謹行)으로 후군을 이끌도록 하였다. 글필하력은 645년 당 태종의 원정 시에도 선봉에서 활약한 바 있으며, 661년 소정방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도 압록강으로 진군하여 남생의 군대를 격파한 인물로서 당시 누구보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장수였다.
그런데 이때 당군 출정부터 668년에 평양성을 공격할 때까지 중국 측 역사서 기록들 사이에 착종이 적지 않고, 또 전쟁 전개 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기사 자체가 매우 소략하며 전황의 공백이 많다. 그래서 착종된 기사를 가려내고 단편적인 기사를 엮어서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고려하면서 당군의 침공 과정과 고구려군의 대응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사료상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에 이르는 과정을 최대한 복원하려는 이유는 남생의 투항이 고구려 멸망에 얼마나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동하였는지를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논증을 위해 다소 서술이 장황해지더라도 널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당군은 666년 9월에 선봉인 방동선이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에 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당군과 합류하였는데, 이때 남생이 가물성(哥勿城), 남소성(南蘇城), 창암성(倉巖城) 등을 바쳐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신당서' 천남생전에 전하고 있다. 당시 당군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없지만, 국내성에 있는 남생과 합류하려면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 남소성을 지나 소자하 유역에서 졸본을 지나거나 혼강 상류에서 국내성으로 진공하는 경로 외에는 달리 경로가 없다.
남소성은 신성 배후의 요충지로서 혼하와 소자하가 나뉘는 길목에 위치한 무순 철배산성으로 비정된다. 역사상 신성과 세트를 이루며 서북 방면에서 적의 침공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가물성, 창암성의 위치는 알기 어려운데, 둘 다 소자하 유역에 위치한 성임은 분명하다. 현재 소자하 일대의 주요 고구려 성곽으로는 신빈의 오룡산성, 구로성, 환인의 오녀산성 등이 있어서 가물성과 창암성을 여기에 비정할 수 있을 듯하다. 창암성(倉巖城)을 신빈 구로성에 비정하기도 하는데, '倉巖'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오녀산성이 더 유력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가물성이 구로성에 해당될 수 있다.
'신당서' 천남생전의 기록대로 이때 남생이 가물성, 남소성, 창암성 등을 들어 당에 항복했다고 한다면, 당시 남생이 국내성은 물론 졸본 지역 및 소자하 유역 일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천남생묘지명'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남생)공이 국내성 등 6성 10여만호의 문적(文籍)과 군사를 이끌고, 또 목저 등 3성이 황제의 덕화를 바라며 함께 귀속해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목저성 역시 소자하 유역에 비정하거나 환인의 고검지산성에 비정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천남생열전'이나 '천남생묘지명'의 기록에 따른다면 당시 남생이 국내성에서 남소성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666년 9월에 당군이 남생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남소성보다 최전선에 위치한 신성(新城)을 우회하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당군와 남생의 합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그랬을까?
그런데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듬해인 667년 9월에 당군이 신성(新城)을 함락시키고 진격하여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倉巖城)을 공략한 후 남생의 군대와 합류하였다고 한다. 앞서 '천남생열전' 기사를 인정하다면, 666년 9월에 남생의 휘하에 있던 남소성, 창암성 등이 당군에게 접수되었다가 그 뒤 어느 시점에서 남생과 당군으로부터 이탈하여 이들과 대결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게 된다. 당과 남생의 연결을 다시 차단하려는 고구려의 공세로 소자하 일대 남소성, 창암성 등을 고구려 중앙정부가 다시 회복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667년 신성 전투의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정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남생이 국내성 일대는 장악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자하 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일대는 신성이 관할하던 구역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남생이 국내성에서 남소성까지 넓은 지역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사실 당군이 부랴부랴 남생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할 정도로 남생이 고립된 상황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파악하고자 한다. 즉 666년 9월에 글필하력 등이 이끄는 당군은 남생과의 합류를 시도하였지만, 신성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 영역 깊숙이 진군이 그리 쉽지 않았을 터이고, 설사 신성을 우회하여 진군하였다고 하더라도 소자하 일대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남생 등 일부 세력이 당에 투항할 수는 있지만, 국내성 등 6성이 모두 투항하여 당의 통제력 안으로 들어간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남생을 구원하면서 국내성 일대를 장악하려는 당군의 목표 실현이 여의치 않자 이어서 12월에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645년 당 태종의 친정 때 총사령관을 맡았던 노장 이세적을 다시 불러 총사령관직을 맡겼다. 당시 당에서 고구려 원정군을 이끌 수 있는 인물로는 소정방이 있는데, 이듬해에 사망한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시 병중에 있어서 원정 참여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이세적을 다시 불러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출정하고 있던 계필하력의 군대 역시 이세적의 지휘 아래 편입시켰다. 그리고 하북(河北)에 있는 여러 주의 조세를 역시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량과 전쟁 비용을 충당케 하였다. 그야말로 고구려 정복을 위한 본격적인 대규모 원정군을 서둘러 편성한 것이다.
"신성은 고려 서쪽 변경의 진성(鎭城)으로 가장 요충지다. 만약 먼저 도모하지 않으면 나머지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이세적은 645년 당 태종의 침공 시에도 선발대를 이끌고 현도성과 신성을 공격하였고, 647년 5월에도 신성을 우회하여 남소성, 목저성을 차례로 공격한 바 있어 누구보다도 신성이 갖는 전략적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군은 신성 공략에 매달렸지만, 신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역시 고구려 서북 최대 요충성이라고 할 만했다. 645년 안시성 전투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8개월 가까이 항전이 계속되면서 성안의 저항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9월이 되어 성안에서 사부구(師夫仇) 등 투항자들이 성주를 묶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신성의 함락 아니 투항은 이미 그 이전에 고구려 방어 시스템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예컨대 8개월의 항전 동안에 외부에서 어떠한 지원도 기록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방어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면, 최소한 요동성이나 국내성에서 지원군이 나타나 당군의 배후를 위협해서 신성의 항전을 뒷받침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국내성을 장악한 남생은 당군에 투항 의사를 밝힌 터이니, 신성을 후원하기는커녕 신성의 배후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소성이나 목저성에 압력을 가하고 있을 터였다. 요동성은 방어 시스템의 중진으로서 위상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높거나, 아니면 당군에 의해 신성 지원이 봉쇄되었을 수도 있었다.
당군도 이제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체계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이니, 방어망의 연결망을 끊어가면서 국내성의 투항으로 가장 약한 고리가 되어 있는 신성 공략에 집중했을 것이다. 8개월간의 항전 끝에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진 투항하였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의 치열한 항전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고구려 중앙정권의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국내성을 틀어 당에 투항한 남생의 원죄가 가장 크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신성의 함락과 국내성의 투항. 당의 침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왔던 요동의 거대한 방파제의 한 곳이 무너졌다. 둑이 아무리 길고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한 곳이라도 무너지면 그곳으로 거침없이 해일이 밀려 들어오듯이, 당의 대규모 침공군이 고구려 안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하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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