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편지
[기억할 오늘] 8월 2일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소 교수 아인슈타인(1879~1955)의 1939년 여름 피서지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 “가장 끄트머리, 외지고 아주 조용한” 바닷가의 한 별장이었다. 헝가리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실라르드 레오(1898~1964)와 유진 위그너가 그를 찾아왔다. 실라르드는 베를린대 시절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듣고 논문을 쓴, 제자 겸 동료 물리학자였다. 그가 꺼낸 용건은 중력장 연구에 몰두하던 아인슈타인의 만년의 평온을 여지없이 흔들어놓았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비밀입니다. 리제 마이트너 박사와 오토 한 박사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우라늄을 쪼갰다는 얘기는 아시죠?”
“실라르드, 지금은 개나 소나 다 우라늄을 쪼개고 있다네. 페르미도 로마에서 그 실험을 했고 말이야.” -‘아인슈타인의 편지’(장 자크 그리프 지음ㆍ하정희 옮김, 거인)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실라르드가 발견한 핵 연쇄반응(연쇄 핵분열) 원리 이야기를 거쳐 가공의 궁극무기 원자폭탄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고, 나치 독일이 가장 앞서 있다는 소식으로 이어졌다. 결론은 미국이 서둘러야 하고 그렇게 하는 데 아인슈타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거였다. 원폭의 기본 원리인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본 공식(E=MC²)을 내놓은 아인슈타인으로서는 한기를 느낄 만한 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써서 대책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는 실라르드의 제안에 즉각 동조했다.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가 ‘F.D 루즈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쓴 편지에 발신인으로 서명했다. 한 달 뒤 2차대전이 터졌고, 41년 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도 가동되기 시작했다.
45년 3월 실라르드가 다시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이번엔 정반대 이야기, 즉 독일의 폐색이 짙어지면서 원자탄 제조 계획을 사실상 포기한 만큼 미국의 시도도 중단시켜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미 폭탄은 만들어진 뒤였고, 4월 루즈벨트도 세상을 떴다. 후임인 트루먼은 8월 새 무기를 히로시마에 투하해 종전을 앞당겼다.
아인슈타인은 전후 냉전 진영이 벌인 핵 경쟁의 광기를 제대로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편지에 서명한 일을 내내 후회했고, 실라르드 역시 62년 반핵군축을 촉구하는 평화주의자 모임인 ‘살만한 세상을 위한 위원회(Council for a livable World)’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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