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일으킨 조선후기 '책가도 열풍', 유럽·중국 거쳐 온 '글로벌 아트'였네
[ 김경갑 기자 ]
책을 유달리 사랑한 조선 정조는 어좌 뒤에 ‘일월도(日月圖)’ 대신 ‘책가도’를 걸어놓았다. 책가도는 책가(서가)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 문방구, 향로, 화병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책거리라고도 한다. 군주의 각별한 관심은 궁중에 책가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양반사회를 중심으로 민간에도 책가도가 유행하며 200여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때 ‘책가도’를 비롯한 조선시대 국보급 궁중화와 민화 걸작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과 현대화랑이 오는 8월28일까지 여는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巨里)’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경기도박물관을 비롯한 국공립·사립미술관·화랑 등 20여곳이 내놓은 명작 58점이 걸렸다. 최초 공개된 명품이 대부분이다.
◆명품 민화의 세계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책가도 6폭 병풍’은 정조 때 제작된 대표적인 책가도다. 책장을 비롯해 중국식 도자기, 문방구, 화병, 안경 등을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과 명암법으로 처리했다. 색깔이 화려하고 묘사도 직설적이다. 과감한 표현, 단아한 구도, 놀라운 상상력 등 전통 채색화가 지닌 특징이 살아있다.
궁중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병풍에서는 간결, 청렴, 결백의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고, 장한종의 ‘책거리’에는 인문학과 예술의 조화를 즐기는 선비들의 풍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호피에 그린 ‘호피장막도’는 오방색의 조선 민화와 달리 진노란색 빛깔이 특이하다. 한 땀 한 땀 오색 실로 뜬 ‘자수책거리’, 화조와 용을 담아낸 작품들은 방금 화실에서 꺼내온 듯 채색 또한 생생하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씨는 “정조에 의해 창출된 책가도 문화는 고려시대의 전통 채색화를 복원한 것”이라며 “조선 상류층의 기호와 풍속도 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책가도에서 잠시 눈을 옮기면 궁중 민화의 이름을 드높인 문자도가 유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꽃과 새들로 글자를 새긴 ‘화조문자도’, 유교 덕목을 담은 ‘유교문자도’,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와 복(福)의 글자를 100개씩 쓴 ‘백수백복도’ 등은 문자나 상징물을 빌려 왕실의 바람을 담았다.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나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말에서 보듯 인문학과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요즘 만들었다고 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문자디자인 감각이다. 전시 기간에는 여름 민화학교, 민화 그리기교실 행사도 열린다. 관람료는 어른 8000원, 어린이·청소년은 5000원. (02)580-1300
◆세계로 가는 ‘글로벌아트’ 책가도
책가도는 청대의 궁중 장식화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그림이다. 책을 통해 문치(文治)를 하려 했던 정조의 구상에 따라 화원이 처음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뿌리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귀족의 작은 서재였던 ‘스투디올로(studiolo)’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투디올로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전파돼 ‘호기심의 방’이 됐고, 17세기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져 ‘다보각경(多寶各景)’의 장식장 문화를 형성했다. 다보각경이란 다보각(多寶各) 또는 다보격(多寶格)이라는 장식장에 귀중한 서적과 도자기, 골동품 등을 넣어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이것이 조선의 책가도로 진화했다.
정병모 울산대 교수는 “책거리는 동서 문화를 지식으로 잇는 ‘책의 길(bookroad)’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국제적인 면모를 가진 그림”이라며 “정조에 의해 시작된 궁중의 책거리는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각광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문자도와 책거리는 왕실의 화려한 병풍부터 허름한 여염집 벽장문까지 생활공간을 장식한 ‘생활부적’ 같은 그림”이라며 “이번 전시회의 목표는 K아트의 실질적인 글로벌화”라고 말했다. 서울 전시가 끝난 뒤 오는 9~12월 미국 뉴욕 스토니브룩대 찰스왕센터를 시작으로 내년에는 캔자스대 스펜서박물관(내년 3~5월), 클리블랜드미술관(7~9월)에서 차례로 순회전이 펼쳐진다. 내년 4월에는 캔자스대에서 책거리에 관한 국제학술대회도 열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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