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다짐과 스페인어학사전[유희경의 시:선(詩:選)]

2024. 1. 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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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무렵 서점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긋한 연세에 한 마디 한 마디 존대를 잊지 않는 예의 있는 분이다.

주문 완료 버튼을 클릭하려다 말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노인 두 분이 스페인의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핥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마 사전을 주문한 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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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과 날숨의 경계에서/ 잠깐씩 멈췄다// 어제는 가령/ 아침에 꿈을 꾸었다//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다// 뒤집어 보아도 내부가 없을 때// 뒤집히기만 할 때//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신수형 ‘행성의 끝’(시집 ‘무빙워크’)

연말 무렵 서점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긋한 연세에 한 마디 한 마디 존대를 잊지 않는 예의 있는 분이다. “스페인어학사전이 있을까요.” 나는 귀 뒤를 긁적이며 서점을 둘러보았다. 있을 리 없다. ‘사전’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찾지 않는다. “그러면 주문이 가능할까요?” 요즘은 컴퓨터로, 아니 전화기로 다 찾을 수 있다고 말씀드려야 하나 망설이는데 “새해 스페인어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친구랑.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갈 거예요” 하고 수줍게 웃는다. 그렇다면 지옥에서라도 구해 와야지. 꼭 구해놓겠다고 장담하고선 전화를 끊는다. 도매상에 작은 스페인어학사전이 있다. 글자가 깨알 같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리라.

새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지난해와 고작 하루 차이인데 새 사람을 만든다. 거기에는 나이 같은 건 상관없는 무한한 백지만 존재한다. 그 위에 그려지는 것은 근사한 ‘나 자신’이다. 삶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많은 이의 다짐 속에 세워지는 새해 목표와 계획 덕분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겸손과 선함을 주저하지 않는 일월의 마법. 반성한다. 올해 나는 새해 목표를 설정해놓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새 목표란 나름의 가치가 ‘분명히’ 있다. 주문 완료 버튼을 클릭하려다 말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노인 두 분이 스페인의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핥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마 사전을 주문한 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그라시아스(Gracias). 스페인어로 ‘고마워요’라는 뜻이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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