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큰 무대에 서면 몸이 얼어붙는 이유
필자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나오면 '이게 예술이지 스포츠인가'라며 동작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당시만 해도 선수 대다수는 유럽과 북미, 특히 동구권 국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김연아라는 선수가 혜성처럼 나타나 두각을 나타내더니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됐다.
당시 동구권 선수들은 주춤했고 공교롭게도 동갑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와 수년째 라이벌 구도를 이어왔다. 안 그래도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는 건 스트레스였는데(혹시 점프하다 실수할까봐) 올림픽 같은 큰 대회에서 숙명의 한일 대결까지 겹치니 도저히 생방송 장면을 볼 수 없어 내 방에서 거실의 TV 중계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 선수나 한일전 같은 비본질적인데 몰입돼 스포츠 자체를 즐기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차이
그런데 막상 선수들은 어땠을까. 4년 동안 벼르던 그날 수많은 관중 앞에서 홀로 빙판 위에 선 순간 압박감은 엄청날 것이다. 십중팔구 그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치지 않았을까. 아무튼 김연아 선수는 실수하지 않고 기량을 100% 발휘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반면 아사다 마오는 그랑프리 파이널 같은 대회에서는 여러 차례 금메달을 땄지만 올림픽에서는 안타까운 실수를 하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은메달에 그쳤다.
이를 두고 아사다 마오 선수를 '유리 멘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사실 김연아 선수가 '강심장'이라고 봐야 한다. 많은 선수가 큰 경기나 역전을 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 2001~2019년 미식축구를 분석한 결과 정규 시즌 필드골을 성공시킨 비율은 75%지만 경기 시간이 2분이 채 남지 않았을 때 킥을 성공하면 동점 또는 역전이 되는 상황에서는 66%로 떨어졌다. 오죽하면 '큰 경기에 명승부는 없다'는 말이 있을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처럼 보상이 아주 클 때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을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choking under pressure)'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스포츠 경기뿐 아니라 일상의 여러 상황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 다음 달에 있을 수능결과(성적)가 좋으면 엄청난 보상(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이 따른다. 이로 인해 많은 수험생이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을 경험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심리적 설명은 사회적 압력, 주의 산만, 지나친 각성 등이 있고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 뇌 활동을 분석한 결과도 있지만 관련된 신경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를 위한 마땅한 동물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이 동물에서도 나타날까.
● 보상 아주 크면 성공률 떨어져
얼핏 생각하면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은 사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처럼 느껴진다.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노력 등은 꽤 인위적인 설정 아래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1년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에 원숭이도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을 보인다는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스티븐 체이스 미국 카네기멜론대 바이오의공학과 교수팀은 '속도+정확도 작업'이라는 행동 실험을 고안했다. 원숭이는 커서에 손을 대고 있다가 표적이 나타나면 재빨리 손을 표적으로 이동해야 한다.
일정 시간 일정 범위 내에 손을 대야 성공하고 보상으로 달콤한 주스를 받는다. 이때 보상은 크기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작은 보상은 주스 0.1㎖, 중간 보상은 0.2㎖, 큰 보상은 0.3㎖이고 저자들이 잭팟 보상이라고 부른 아주 큰 보상은 중간 보상의 10배인 2㎖나 된다. 참고로 각 보상은 표적의 색으로 구분할 수 있게 훈련했다.
실험 결과 원숭이들은 큰 보상까지는 보상이 커질수록 작업 성공률이 높아졌다. 보상이 클수록 동기 부여도 커져 집중력이 높아진 결과로 해석된다. 그런데 표적에서 잭팟 보상 신호를 보면 오히려 성공률이 떨어졌다. 즉 보상 크기에 따른 성공률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뒤집힌 U자(∩)' 패턴을 보였다.
● 압박감으로 운동뉴런 활동 감소
동물도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을 보인다는 논문이 나가고 3년이 흐른 지난 9월 학술지 '뉴런'에는 이런 현상이 생길 때 뉴런 활동의 변화를 분석한 같은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연구자들은 원숭이 뇌의 운동피질에 전극이 있는 칩을 꽂은 뒤 과제를 수행할 때 뉴런의 활성을 측정했다.
표적은 손이 놓인 커서에서 임의의 거리와 방향에서 나타나므로 그때마다 뉴런 활성 패턴이 달라진다. 이런 경향은 보상이 커질수록 뚜렷했는데 다만 큰 보상까지만 그랬다. 잭팟 보상이 주어졌을 때는 오히려 패턴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즉 잭팍 보상에서는 표적의 위치를 나타내는 신호 정보가 약해졌고 그 결과 행동 속도가 느려지고 정확도도 떨어져 성공률이 낮아진 것이다.
한편 작은 보상과 잭팟 보상에서 실패율이 높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즉 작은 보상에서는 동기 부여가 안 돼 집중력이 떨어진 결과이고 잭팟 보상에서는 압박감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차이는 실패 패턴의 차이로도 드러난다. 즉 작은 보상에서는 이동한 손이 표적의 위치에 못 미쳐 멈추거나 지나쳐 멈춰 실패한 횟수가 비슷했다. 반면 잭팟 보상에서는 표적에 이르기 전에 멈춰 실패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다. 압박감으로 행동이 움츠러든 결과로 보인다.
● 경험 잦아지면 극복할 수 있지만...
이번 실험에서 네 가지 보상이 나타나는 빈도는 잭팟 보상이 5%이고 나머지 세 보상이 각각 31.6%로 같다. 즉 잭팟 보상은 20번에 1번꼴로 나오는 드문 기회다. 이렇게 배분한 이유는 2021년 실험 결과 때문이다. 잭팟 보상이 나오는 빈도를 나머지 세 보상과 같게 하면 성공률이 떨어지는 정도가 확 줄어든다. 압박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신인 아이돌 그룹이 처음 음악 방송에 출연하면 긴장한 나머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라이브 실력이 별로"라는 식의 혹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무대를 반복하면 긴장이 풀리면서 제 실력이 나온다. 즉 잭팟 보상 경험이 잦아지며 더 이상 잭팟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 결과다.
물론 이들도 더 큰 무대에 서면 다시 잭팟 보상의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지난봄 한 걸그룹이 미국 최대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 무대에 섰다가 큰 비난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들이 실력이 없다기보다는 무대에 압도돼 얼어버린 결과일 수 있다. 2년 전 또 다른 걸그룹도 역시 코첼라 무대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비교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블랙핑크다. 이들은 2019년과 2023년 두 차례 코첼라 무대에 올라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불과 데뷔 3년 차였던 2019년 무대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일약 세계적인 걸그룹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대성공이 운인지 실력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엄청난 잭팟 보상 상황에서 압박감으로 인한 경직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블랙핑크 멤버나 김연아 선수나 다들 강심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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