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동원, 이름 없는 피해자들] ③ '사할린 탄광에 묻힌 청춘' 최광호씨 증언
하루 10시간 이상 2교대 '갱도 지옥'
배고파 해안 미역 ·잡초 주워 먹어
몸 금세 망가져도 발길질 날라와
말썽땐 '감금조' 신세…현지 수백개
죽게되면 그냥 묻어버리면 그만
해방 후 귀향 시련…죽거나 버려져
난 우여곡절 끝 왔지만 생계 걱정
미래 불투명…어둠속 헤매는 기분


인천일보가 기록하는 강제동원 피해 증언집. 세 번째는 최광호(100)·김영식(96)씨 이야기다.
최광호 씨는 열여덟 되던 해, 하루 만의 통보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주야 교대로 굴진·운반·채탄에 시달렸다. 해방 후에도 귀향길은 막혔고, 사할린 땅에서 한평생 묶여야 했다. 2014년이 돼서야 한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끝없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김영식 씨는 열다섯 겨우 된 나이에 '차출' 통보를 받고 홀어머니와 누이들을 뒤로한 채 일본으로 향했다. 나고야의 알루마이트 공장에서는 하루 종일 굶주림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공습이 쏟아지는 날에도 일본인 감독의 명령에 따라 몸을 내던져야 했다.
#1. 돌아갈 길 없이 끌려온 일본
1925년 평범한 농부 집 막내로 태어났다. 열여덟 되던 해 여름, 경찰 주재소에서 닥친 부름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대동아 전쟁 마지막 결전이다. 탄광에서 6개월만 일하라"는 얘기만 들었다. 고향 논밭과 가족을 뒤로하고 길도 모른 채 떠났다. 일본 도착 후 손에 쥔 계약서에는 '6개월' 아닌 '3년'이 적혀 있었다.
#2. 갱도에 갇히다…절망의 연속
사할린 기타카시호 탄광 갱도는 지옥이었다. 축축한 어둠 속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고, 발밑의 끈적이는 진흙은 걸음을 붙잡았다. 칼날 같은 석탄가루는 목을 찢었다. 하루 10시간 넘게 주야 교대로, 채탄·굴진·운반을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했다. 250톤 넘게 캐야만 겨우 한숨 돌렸다. 일본인은 하루 10~15원을 받았지만, 조선인은 3분의 1밖에 받지 못했다. 죽어라 일해도 어떤 날은 3원만 손에 쥐기도 했다. 돈은 탄광 계좌에 묶였다. 식사는 모래 섞인 밥 한 공기, 건더기 없는 국 한 숟갈이 전부였다. 배고픔에 바닷가에서 미역과 잡초를 주워서 씹어 넘겼다.
#3. 짐승보다 못한 삶, 두려움과 고통
갱도에서 몸은 금세 망가졌다. 갱 안에서 허리를 굽히고 장시간 일하다 보면 허리와 무릎이 퉁퉁 부었다. 쓰러져도 "일하면 낫는다"며 발길질이 날아왔다.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는 인부는 갱 입구에 내팽개쳐졌고, 교대가 끝나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랑자나 문제를 일으킨 인부는 '다코비아'라는 감금 노동조에 들어갔다. 그저 먹고 일하고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시병은 몽둥이로 머리를 후려쳤다. 죽지 않을 만큼 골통만 팼다. 그런 노동조가 사할린에 수백개였다. 노예 같이 일하고 돈은 주인이 챙겼다. 죽게 되면 그냥 갖다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4. 한평생 갇힌 사할린, 끝나지 않은 고난
해방이 찾아왔지만, 귀향길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야매 배'라도 타고 고향 갈 수 없으려나 항구를 기웃거렸지만, 소련 해군이 국경을 막아 배가 못 떴다. 일본인이 살다가 버리고 떠난 빈집을 전전했다. 러시아인이 세운 빵 공장을 기웃대면 "빠숄 뜨이 나 쵸르또이 사무라이(사무라이는 악마한테로나 꺼져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조선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상대가 알아듣질 못하니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1949년, 겨우 러시아인 친구 도움으로 소련 여권을 받았지만, 귀향은 꿈도 못 꿨다. 귀국 청원을 낸 자들은 북조선 강제 이송 혹은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져 죽었다. 그렇게 사할린 땅에서 한평생 가까이 묶여 있었다.
#5. 귀국했지만 끝나지 않은 고난
2014년 '사할린동포 지원 특별법' 덕에 아내와 한국 땅을 밟았다. 여기서는 돈이 발목을 잡고 있다. 나는 늙었고, 건강도 좋지 않다. 피해자에 대한 국가 지원이 없다 보니 손주들 교육비, 생계 걱정에 매일 마음이 무겁다. 어렵고 고단한 한국 생활 속에서도 가족이 함께 있어 다행이라지만, 미래가 불투명해 끝없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다. 내 자식과 손주들이라도 진정한 고향, 한국 땅에서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해주길 간절히 바랄 분이다.
/박다예 기자 pdye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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