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동원, 이름 없는 피해자들] ③ '전쟁과 노역, 두 겹의 고통' 김영식씨 증언

박다예 기자 2025. 8. 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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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겨우 마치고 日 공장 취직
본사 차출 미명 한겨울 日 끌려가
우릴 기다린건 굶주림·강제노동
하루 콩깻묵밥 한 덩이 국 한모금

해방 다가오자 밤 ·낮 B-29 폭격
아비규환 불 지옥서 겨우 살아나
뼈만 앙상한 몰골로 고향 돌아와

빼앗긴 세월은 되찾을 수 없지만
명예만은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 강제동원 피해자 김영식(96)씨가 고령의 나이에 아들의 도움을 받아 빼앗겼던 젊은 시절의 아픈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다. 일본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지만 한 달 봉급으로 죽 세 그릇도 살 수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견딜 수 없는 치욕과 억울함이 밀려온다. /사진제공=경기도

#1. 홀어머니·누이와 생이별

1929년 겨울, 가난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삯 바퀴를 돌리며 인력거를 끌어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학교도 겨우 소학교를 마쳤고, 양은그릇을 만드는 알루마이트 공업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던 1944년 겨울, 동짓달의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차출'이라는 말에 휩쓸렸다. 일본에 가야 한다는 통보를 들은 지 고작 하루 만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공장 사람들 가운데 열일곱이 그날 끌려갔다. 서울역에서 부산까지, 다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거기서 나고야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 길에서 일본 여관 밥을 얻어먹었는데, 그것은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에 밥을 섞은 '콩깻묵밥'이었다. 쥐새끼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그런 음식이었다. 그날의 냄새와 푸석한 질감은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다.

#2. 죽 두 그릇 값이었던 봉급

나고야의 알루마이트 본사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두가 잠시 꿈을 꿨다. "본사면 돈 많이 벌 거다, 가서 열심히만 일하면 된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일본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를 기다린 건 굶주림과 강제노동이었다. 하루 종일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고된 일을 했다. 하지만 배고픔은 그 어떤 노동보다 더 잔혹했다. 하루 식량이라야 손바닥만 한 그릇에 주먹 크기의 콩깻묵밥 한 덩이, 그리고 물에 가까운 미소국 한 모금이었다.봉급은 12원. 시내까지 10리를 걸어가야 겨우 보이는 죽집에서 죽 한 그릇이 5원이었다. 계산해보니, 내 한 달 품값이 죽 두 그릇 반이었다. 그마저도 사서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죽집 주인은 늘 "다 팔렸다"며 문을 닫았다. 조선 놈은 꺼지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돈이 아니라 나의 노동이, 나의 존재가 아무 값도 없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새겨졌다.

#3. 공습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지난날

해방이 가까워져 오자 폭격이 날마다 쏟아졌다. 일하다가 공습 기미가 보이면 일본인 감독이 "빨리!"를 외치며 우리를 큰 개울 둑으로 내몰았다.

B-29 폭격기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칼날 같은 쇠 파편이 빗발쳤다. 살갗에 스치기만 해도 피가 솟았다. 그 소리, 쇳조각이 땅과 몸을 때리는 소리는 지금도 귀를 찢는다. 밤에도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시내는 불길에 휩싸여 붉은 지옥이 됐다. 격추된 비행기는 불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종전이 가까워지자 재료가 바닥났고 일도 사라졌다. 우리는 여전히 굶었다.

#4. 통째로 잘려 나간 삶…명예 회복해야

맨몸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어머니 혼자 초라한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턱을 넘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껴안았다. 피골이 상접해 뼈마디가 드러난 내 몸을 어루만지며, "그래도 손발 멀쩡히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눈물이 터졌다.

내 열여섯은 그렇게 잘려 나갔다. 유년은 전쟁과 침탈에 산산이 부서졌고, 그 상흔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지금 나는 그 빼앗긴 세월을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름 없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삶이라도, 그 명예만은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박다예 기자 pdye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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