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24시간 ‘온콜’… 환자가 필요로 할 때 있어야 의사”[바이털 닥터]

권도경 기자 2025. 4. 24. 1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바이털 닥터 - 서울권역외상센터 흉부외상 전문의 김영웅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로 활약
남수단서 총상환자 등 위해 봉사
흉부외상 전담 전문의 태부족
지금은 서울권역 지켜야할 때
非외상센터 의료진과의 ‘빅팀’
외상환자 치료 절반은 그들의 공
1명 살리면 가족 수십명 삶 구해
온전하게 돌려 보내는 것이 사명
지난 3월 20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서울권역외상센터 앞에서 김영웅(가운데) 흉부외상 전담 전문의가 외상환자를 살리기 위해 동고동락하는 외상전담 간호사들과 함께 미소 지으며 서 있다. 문호남 기자

지난 2005년 여름 강원 강릉시 강릉아산병원 작은 도서관. 의료봉사를 나온 의대생의 시선이 책 한 권에 멈췄다. 낡은 책장에서 꺼낸 책은 ‘국경없는의사회’. 단숨에 읽어 내려간 책에는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 피해를 입은 환자들을 공정성·중립성·독립성 원칙에 따라 치료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 어떤 가치보다 환자 생명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진정성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책을 덮으면서 결심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로 ‘현장’에 나가겠다고….

서울 ‘빅5’병원 인턴 시절엔 ‘서저리(Surgery·외과)’가 들어간 진료과에 끌렸다. 유독 재밌던 흉부외과를 택한 건 필연이었다. 심장과 폐 등 목숨과 직결된 장기를 다친 환자들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에 뒀다. 흉부외과 전문의를 딴 후 2019년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로 내려갔다. 흉부외상 1세대로 당시 센터장이었던 조현민 한라병원 지역의료선진화추진본부장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외상 수련을 통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기준을 맞춰놓고 싶었다.

외상 세부 전문의 수련을 마친 후 2021년 분쟁지역인 남수단으로 파견을 갔다. 총상, 사지 절단 등 중증 외상환자부터 제왕절개가 필요한 임신부까지 찾아왔다. 외과계 의사는 혼자였다. 석 달간 ‘메스’가 필요한 모든 환자들을 받아냈다.

귀국 후 서울 강남 대형병원에서 조교수로 일하던 그에게 2023년 5월 김영환 전 국립중앙의료원(NMC) 서울권역외상센터장이 찾아왔다. 김 전 센터장은 두 달 후 NMC에 권역외상센터가 생기니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병원에 바로 사직서를 냈다. NMC 서울권역외상센터 개소 멤버인 김영웅 흉부외상 전담 전문의 얘기다. 지난 3월 20일 서울 중구 NMC 서울권역외상센터에서 만난 김 전문의는 “흉부외과 의사도, 외상외과 의사도 부족한데 흉부외상 전담 전문의는 더더욱 부족하다”며 “지금은 서울권역외상센터를 지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약 900만 명이 사는 서울에 권역외상센터는 NMC 단 한 곳에만 있다. 인구수가 비슷한 미국 뉴욕시에 최중증 외상환자를 치료하는 ‘레벨1 외상센터’가 13곳(소아 전용 포함) 있다는 점과도 대비된다. 대도시 특성상 서울에선 싱크홀 추락사고, 화재, 교통사고, 산업재해, 자살 등 모든 종류의 외상이 발생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서울의 ‘예방 가능 외상사망률’은 12.4%다. 중증외상시스템이 발달한 미국, 일본 등은 5% 미만이다. 서울에서는 살 수 있는 외상환자가 선진국 주요 도시보다 2배가량 더 숨진다는 의미다. 이는 가장 많은 대형병원이 쏠려있는 서울에 권역외상센터가 따로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김 전문의는 “외상환자들은 우리 곁에서 일상을 멀쩡하게 살아가던 이들”이라며 “중증외상은 부자와 유명인 등 사람을 가리지 않아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상환자 1명이 생기면 가족공동체 몇십 명의 삶이 무너지게 된다”며 “가족공동체를 지켜주는 ‘보험’이자 사회가 보장해야 할 안전망이 권역외상센터”라고 강조했다.

김 전문의는 흉부외상 환자를 위해 1년 365일 24시간 온콜(연락대기) 상태다. 소생실 바닥이 피로 흥건한 일은 흔하다. 그는 환자를 기다리면서 양말부터 벗는다. 환자 피로 발을 적실 때가 많아서다. 이때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일반 환자는 병원과 의사를 선택해 찾아오지만 외상환자는 정반대다. 외상환자가 실려올 때는 예후조차 가늠할 수도 없다.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란 단상은 “환자 왔어요”란 구급대원의 외침 한 마디에 “환자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이 자리에서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자”로 바뀐다.

흉부외상 전담 전문의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은 환자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이다. 김 전문의는 “외상센터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건 외상환자가 다치기 전에 속했던 가족의 품, 사회로 온전하게 돌려보내는 것”이라며 “의식 없이 실려 왔던 외상환자가 치료를 마친 후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걸어들어올 때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극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큰 동기부여도 된다. 그는 “권역외상센터는 외상 치료의 최전선”이라며 “의료와 사회가 접점을 이루는 분야에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건 가족공동체를 지켜줄 수 있고 사회 안전망이 될 수 있는 일이라서 보람이 크다”고 했다.

외상환자는 소생 후 치료와 재활이 시작된다. 재원 기간은 길지만 의료 자원도 많이 투입된다. 병원 경영 측면에선 달갑지 않은 존재다. 이에 NMC는 국가기관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지닌다. 서울권역외상센터엔 외상전담전문의가 총 10명 있다. 하지만 외상환자 1명을 살리는 데는 NMC 전체 의료진이 힘을 보탠다. ‘천재 의사’라고 해도 외상환자를 혼자 살릴 순 없다. 김 전문의는 “외상환자들은 뇌전증, 당뇨 등 기저질환을 가진 경우가 많다”며 “NMC 내 정형외과, 내과, 신경외과 등 모든 의사들이 외상중환자실을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면서 외상 치료의 절반가량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상 치료는 팀과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다”며 “외상환자를 고치는 절반의 공은 권역외상센터에 속하지 않는 의료진들에게 있는데 이들이 ‘빅팀’을 이뤄줬기에 센터가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력을 다해 살린 환자에겐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의사는 환자가 필요로 할 때 그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환자들이 받아야 될 치료를 하는 게 의사가 할 일이죠. 제가 권역외상센터에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해요. 환자에겐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저를 잊어버려도 좋아요. 저를 기억한다는 건 환자가 고통스러운 사고를 잊지 못한다는 거니까요. 그럼에도 저를 기억해주시겠다면 환자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손 내밀어 일으켜 준 사람이면 족해요. 툭툭 털고 자기 삶을 살아갔으면 해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권역외상센터에서 환자의 일상을 지키면서 의사로서 제 삶도 살아내고 싶어요.”

권도경 기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