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카르텔 낙인, 시스템 불신 키워…장기 계획으로 대체불가 기술 키워야"
국내 과학계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석학들이 과학기술이 글로벌 패권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대전환 시대'에 혁신을 이끌기 위한 흔들림 없는 과학기술 정책 기조가 없다는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변해서는 안되며 국가 전체가 지향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목표와 비전을 합의하고 한국만이 할 수 있는 혁신기술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목소리는 18일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최종현학술원의 이공계 석학 네트워크인 과학기술혁신위원회(과기위) 위원들이 모여 국가 과학기술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포럼 '과학기술의 시대, 흔들리지 않는 국가전략을 묻는다'에서 쏟아졌다. 최종현학술원은 SK그룹이 故최종현 선대회장 20주기를 기념해 2018년 출범한 비영리 지식 플랫폼이다. 과기위는 국내외 50여 명의 이공계 석학으로 구성됐다.
이날 포럼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물리학회장에 선정된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교수, 유력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되는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 단장(서울대 석좌교수),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인 염한웅 포스텍 교수, 이상엽 국가바이오위원회 부위원장(KAIST 연구부총장), 전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인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 교수 등 20여명의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현장과 화상을 통해 참가했다.
우선 과학자들은 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쓴소리를 냈다. 염한웅 교수는 발표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기존 연구개발(R&D) 확대 정책을 부정하고 R&D 예산 배분을 '카르텔'로 규정해 R&D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취약성이 증폭됐다"고 비판했다. 현택환 교수는 "지난 2년간 국내 R&D 예산 대신 미국 중심의 국제공동연구 예산이 많이 늘어났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R&D 예산을 대폭 줄이는 등 미국 과학계가 최근 굉장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한 국제공동연구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혁신 기술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염 교수는 중국 '딥시크', 미국 '챗GPT'가 등장하자 한국이 갑작스럽게 AI 분야에 R&D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는 데 대해 "이른바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국가가 중점 기술 몇 가지를 선정해 집중 투자함으로써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추격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혁신이 나올 수 없다"며 "새로운 혁신 기술이 나올 때마다 한국이 휘청거리며 R&D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상엽 교수는 "예산, 인력 규모로는 중국, 미국 등을 앞서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불가 기술·산업·제품·서비스(NFTIPS·Non-Fungible Technology, Industry, Products, Service)를 추구할 수 있는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인 과학기술 정책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려면 기초과학에 토대를 둔 과학 생태계 육성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정동 교수는 "애플은 2013년 전기차 '애플카'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10년 후 포기했지만 샤오미는 전기차 개발을 선언한 지 3년만에 만들어냈다"며 "R&D 생태계 안에 다양한 기초과학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권에 따라 흔들림 없는 과학기술정책 기조를 만드는 데 기탄없이 과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도 나왔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중요한 과학정책 어젠다가 실제로 입안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IBS 단장, 교수 등 개별연구자부터 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등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예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헌법 제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경제 발전에 국한된 과학기술의 정의를 확대해 국가의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경제 성장의 도구보다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 지원과 보호가 헌법 수준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날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이사는 "과학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하며 "과학기술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전 녹화된 영상을 통해 기조연설자로 나선 공치황 중국 베이징대 총장은 중국의 과학기술과 교육을 통한 국가 부흥 전략을 소개하며 "한국 및 글로벌 파트너와 함께 과학기술 진보와 인류사회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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