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폐족

이상렬 2025. 4. 1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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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우리는 폐족(廢族)이 됐다.”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파면한 뒤 열린 의총에서다. 폐족이란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할 수 없게 된 가문을 일컫는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가족을 표현한 이 말을 한국 정치에 등장시킨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안희정씨다. 그는 2007년 대선에서 참여정부 세력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뒤 “친노라고 표현돼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란 글을 썼다. 그해 17대 대선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완승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진보 정권 10년 만에 보수 진영이 정권을 되찾은 것이었다. 참여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굵직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국민의 삶은 평온하지 못했다. 특히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대변되는 부동산 정책 실패는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결국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 안씨는 당시 글에서 사분오열된 진보 진영의 분열과 자신들의 노력이 국민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시인했다. 그 뒤 친노는 한동안 숨죽여 지냈다.

「 윤 전 대통령 반성도, 승복도 없어
국민의힘은 반탄파가 찬탄파 압도
보수층 기적 바라지만 민심 냉담

국민의힘에서 ‘폐족’ 언급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식하느냐다. 윤 전 대통령 탄핵을 막지 못했다는 것과 그의 실정(失政) 및 계엄 폭주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과오의 성격과 반성의 내용이 천지 차다. 헌재가 지적했듯 정국 파탄엔 거대 야당인 민주당의 책임이 무겁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이 정치를 포기하고 계엄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김웅 전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실정과 폭정에 대해 우리 당이 보였던 모습은 광적인 아부와 충성 경쟁이었다”며 “우리 당은 윤 대통령 파면 제1의 부역자”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이런 반성이 배척되는 게 지금 국민의힘이다. 자신들이 배출한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파면됐다면 뼈를 깎는 참회와 사과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정작 국민의힘의 현실은 탄핵반대파가 탄핵찬성파를 압도하고 있다. 계엄을 강력 비판하고 탄핵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유승민 전 의원(당 대선 경선 불참)이나 탄핵반대파와 거리를 뒀던 오세훈 서울시장(대선 불출마)의 날개가 꺾인 것이 단적인 풍경이다. 그러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탄핵의 강’을 건너려고 한다. 대선 주자 일부는 윤 전 대통령을 찾아가고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

윤 전 대통령은 여전히 계엄에 대한 반성도, 탄핵에 대한 승복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오히려 곧 전장으로 돌아올 투사처럼 행동하고 있다. 지지자들에겐 “늘 여러분 곁을 지키겠다”고도 했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지 않은 채 대선을 치르는 건 정치적 모순을 안고 있다. 헌재는 윤 전 대통령을 재판관 전원(8인) 일치 의견으로 파면했다. 결정문에 “헌법 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했다”고 못 박았다. 헌법 위반으로 파면된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 헌법 수호 책무를 진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대선은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이긴다. 그러나 지금의 국민의힘은 민심과 한참 멀어져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7명이 헌재의 파면 결정에 동의하고 있다. 중도층에선 대통령 탄핵이 잘된 판결이라는 비율이 80%나 된다(한국갤럽 8~10일 조사). ‘이재명 독주 현상’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보수 진영은 선거의 기적을 바랄 것이다. 그것이 ‘반(反)이재명 빅텐트’나 ‘한덕수 차출’이 거론되는 배경일 거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진정한 참회 없이 과연 기적을 부를 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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