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집회 왔다고 기특해마세요, 우린 당신의 동지예요
[조용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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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발과 신문, 머리띠 등 광장의 시간이 담긴 그의 조각들. |
ⓒ 조용미 |
설탕(19세, 여, 학생, 대전 동구)은 그런 스토리와 연출과 연기를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모두 담아낸 뮤지컬을 좋아한다. 원래는 2D(그림이나 만화, 애니 등)만 팠는데(좋아했는데), 어느 날 친구에게 이끌려 본 뮤지컬에 홀딱 빠져들었다.
한창 탄핵 집회가 이어지던 지난겨울에도 <스윙데이즈>라는 뮤지컬을 보고 왔다. 하루쯤 집회에 빠져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더 열심히 나가야지, 각오를 다지고 돌아왔다.
"누군가 나가야 한다면 내가 그 누군가가 되고 싶어요"
다음 집회 때 그는 <스윙데이즈>를 인용하여 시민 발언을 했다. '너 하나 달려든다고 뭘 바꿀 수 있겠냐'는 친구의 말에, '나 같은 사람 뛰어들어서 하루씩, 또 한 사람 뛰어서 또 하루씩, 그렇게 독립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하는 뮤지컬 속 대사를 전하며, 우리도 고작 한 명이지만 그 한 명이 결심을 하고 또 한 명이 광장에 나오면 하루씩 탄핵을 앞당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앞으로도 우리는 그 '한 사람'이 되자고 말했다.
"저는 원래 방관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누군가 나가야 한다면 내가 그 누군가가 되고 싶어요."
계엄이 떨어진 날, 그는 재난 대비 매뉴얼에 따라 짐을 챙길까 고민했다. 군대와 경찰이 이제부터 우리 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엄청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을 보면서 나도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다음날 바로 집회에 나갔다. 태어나 처음 가는 집회라 살짝 긴장해 SNS에서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를 따라다녔다. 다행히 광장은 생각보다 훨씬 안전했다.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했고, 무심한 듯 배려가 넘쳤다.
"조금만 힘든 티가 나면 슬그머니 와서 깃발을 대신 들어주고, 핫팩을 툭 전해주고 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바로 독립했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들었다. 그의 깃발은 깃대가 두 개다. '깃발은 흔들고 싶은데 체력은 없는 협회'라서 그렇다. 깃발을 흔드는 게 아니라 깃대를 양팔에 끼우고 몸을 흔든다. 그래도 기수는 기수라 깃대를 보고 집회 장소를 묻거나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그를 이끌어준 사람처럼 그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깃발은 선두라는 느낌이 강해요. 산 자여 따르라,라는 노래 가사처럼 저는 앞장서고 싶었어요."
광장에는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서 반가웠다. 그의 주변 어른들은 대체로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어서 답답했다. 그는 광장 속에서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정말 옳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국회가 탄핵 가결하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회 장소로 달려갔다.
"'204표'라는 우원식 의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 사람을 마구 끌어안으며 함성을 질렀어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토닥이는데, 좀 울컥하더라고요."
파면 선고가 있던 날은 학교에 있던 시간이라 그런 기쁨을 나누지 못했다. 대신 저녁에 모여 뒤풀이 집회를 열었다. 수고 많았다며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고3도 많았다.
"우리는 너무 억울해요. 우리가 뽑지도 않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해야 했지만, 생일이 6월 이후면 이번 대통령 선거도 참여하지 못해요. 제발 어른들이 제대로 뽑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청소년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시선이 많이 변한 것을 실감한다. '우리는 기특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지 말고 기특해하지도 말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라. 우리는 당신의 동지다'라는 말은 여성에게도 청소년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적용된다. 설탕도 자신에게 그런 편견이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노조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연락하라고 하지 노조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졸업한 후에 그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혼자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특성화고 학생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가 '임금체불이 없는 회사'래요. 근데 광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안 거예요. 저희는 안타까운 사고나 비윤리적 행위, 범법·불법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거든요."
"집회에 나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예요"
우리가 광장에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탄핵을 원한다고 해서 목표 지점이 같은 것도 아니다. 다양한 의견의 사람들이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각각의 목소리가 있다.
그에게는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이 있다. 그에게 동생은 장애인이기 이전에 그저 동생이다. 동생이 괜히 밉기도 한 '흔한 남매'인데, 그가 동생을 미워하면 장애인 학대 또는 장애가 있는 동생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라고 지레짐작한다. 또 동생에게 잘해주면 역시 장애인 가족은 착하다거나 희생한다는 식으로 바라본다. 그는 장애인 가족도 그저 평범한 가족일 뿐이고, 서로 돕기도 하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장애인 가족이라는 건 특징이 될 수 없어요. 장애인 가족도 그냥 평범한 가족처럼 서로 기대기도 하고 독립적이기도 하고 그래요. 발달장애아를 '특별한 아이'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것도 불편해요."
그는 광장에서 덕후들이 눈에 띈 것에 대해서도 덕후라는 정체성으로 묶기보다는 개별적인 한 사람으로 바라보자고 한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들처럼 덕후들도 언제나 거기에 있었는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거고,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덕후가 많아진 것뿐이라고.
"우리는 서사가 있는 스토리를 보고 자라왔어요. 히어로라고 해서 항상 옳지만은 않고 악인들도 항상 나쁘지만은 않아요. 다 개연성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선이 항상 옳은가, 악이 무조건 나쁜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며 자란 세대예요. 주인공이 겪은 고통이 아무리 커도 그가 행한 악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어요."
그는 이번 계엄도 정치라는 스토리 안에서 나름의 이유와 충돌이 있겠지만, 국민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눈 이상 용서 받을 수 없는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앞으로 그는 소수자들의 인권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등 의견이 달라서 소수로 치부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해 다른 집회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현재로선 세월호 추모식과 퀴어 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대단히 정치적인 활동을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살고 싶다.
"집회에 나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예요. 나는 여전히 고3학생이고, 여전히 뮤지컬을 좋아하는 일반인이에요. 집회에 나갔다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광장은 나의 일부"라고 말한다. 다면적인 '나'를 이루는 하나의 면. 그런 의미에서 깃발과 단결 투쟁 머리띠와 파면된 날의 호외 신문을 모아 상자에 잘 담아두었다. 광장의 시간이 담긴 그의 조각들이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이후에도 뮤지컬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신나게 말했다. 태블릿을 열어 중요한 넘버나 대사, 연출 등을 보여주면서 그 시대의 아픔이 지금의 아픔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말했다. 60번이나 봤다는 영화 <더 기버>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전쟁이나 차별 같은 불완전함과 인간의 다양성이 의미하는 바를 전하고자 했다. 나는 보지 못한 영화와 뮤지컬이었지만 설탕의 '덕심'은 충분히 이해했다.
덕후들은 스스로 납득되거나 만족할 때까지 파고든다. 세상에는 점점 덕후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납득될 때까지 답을 요구하고 만족할 때까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파고들 것이다. 어쩌랴. 그게 '나'를 이루는 한 면인 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천둥의 브런치 https://brunch.co.kr/@toddle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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