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선] 정권 바뀌어도 생태계는 그대로였다
지난 3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범했던 착오 중 하나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재판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이 전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정국 돌파의 열쇠로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법정에 맡긴, 근본적인 오판이었다. 정치는 결국 민심의 영역이다.
이 전 대표는 다섯 갈래 재판을 받으며 위기에 몰렸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결과로 보면 그의 사법 리스크는 전화위복이 됐다. 2023년 9월 국회에서 민주당 내 반란표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며 이 전 대표는 벼랑 끝에 섰다. 그러나 법원은 위증교사 혐의가 ‘소명된다’며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을 기각했다. 이후 반란을 주도한 비명계는 총선을 앞두고 축출됐고, 당은 이재명 단일 체제로 재편됐다. 이어진 지난해 11월 위증교사 재판 1심은 위증과 교사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고의성이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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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으로 정국 돌파 기대는 착각
진보 담론 넘을 전략 고민했어야
민심 얻지 못한 게 윤 정권의 실패
」
지난달 26일 선거법 2심은 사진의 일부만 보여주는 건 조작이라는 논리 등을 들어 1심 유죄 판결을 무죄로 되돌렸다. 일련의 재판 결과는 이 전 대표의 정치적 입지를 오히려 강화했고, 특히 지난 2심 무죄 판결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앞둔 상황에서 탄핵론이 기세를 올리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고비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사법적 단죄를 고대했지만 결과는 반대로 이 전 대표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럼에도 국민의힘 일각에선 이번에도 “몇 달만 기다리면 이 전 대표 재판이 열리는데 왜 계엄을…” 같은 말이 나왔다. 이는 안이하고 순진한 기대다. 이 전 대표 재판에서 나타나듯 판결의 진폭이 예상 범위를 벗어나니 앞으로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판결에 기대어 정국을 설계하는 건 요행수를 바라는 정치나 다름없다.
정치는 결국 민심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정치적 소수가 정국을 뒤바꾸는 가장 극적인 사례를 기억해 보자. YS는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아먹는 3당 합당으로, DJ는 만년 지역 정당의 한계를 깨는 DJP 연합으로 정국을 뒤흔들었다. 모두 상대를 자기 쪽으로 흡수하는 정치력의 승리였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법정이 승부를 내주길 기대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집중했어야 할 곳은 재판정이 아니라 지난해 4·10 총선이었다. 유리그릇을 들고 얼음판 위를 걷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여론의 숨결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어야 했다.
총선 3개월여 전인 지난해 1월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9%, 민주당 34%로 당시 여당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현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가 당선돼야’ 응답은 53%로 절반을 넘었고, ‘현 정부 지지를 위해 여당 후보가 당선돼야’는 39%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여권 지지도가 괜찮았지만 언제든 계기만 주어지면 민심은 곧바로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잊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5년 만에 치러진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지만, 득표 차는 0.73%포인트에 불과했다. 대선으로 가까스로 정권만 바뀌었을 뿐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섰지만 학계, 문화계, 시민사회, 공공영역 등 사회 곳곳에 진보 진영이 주도하던 생태계는 그대로였다.
정권 교체보다 더 어려운 게 생태계의 교체다. 관이 인사권을 갖는 공기업이든, 지자체의 재정 지원을 받는 민간단체든 변화는 저항을 부른다. 특히 탄핵으로 한쪽 날개가 뜯겨나간 상태에서 한국 사회의 문화·이념·제도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시스템과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단순히 인사권 행사나 법 개정만으로 단번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부 구조는 그대로인데 보수 정권의 등장 후 자원과 권력을 탄핵 이전으로 되돌리는 재분배가 이어지니 그 저항은 앞선 정권 교체 때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윤석열 정부가 진짜 승부수를 던졌어야 할 전장은 법정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담론과 민심이었다. 어쩌면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한 진지전이야말로 탄핵 후 기사회생한 보수 정권이 진보의 담론에 맞서 고민했어야 할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정치는 사법 판결을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라, 민심의 흐름을 읽고 설득하는 능력에서 판가름난다. 윤석열 정부가 실패한 건 이 전 대표 단죄를 이끌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민심을 얻지 못해서였다. 이미 계엄 이전에 정치가 실패하고 있었다.
채병건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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