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사람의 말 이해하는 유인원] 영어로 의사소통, 게임까지 한 보노보 칸지, 45세에 사망
두 살배기 아기 이상 수준으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고, 석기를 만들어 쓰는 것은 물론, 비디오게임까지 익힌 보노보 칸지(Kan-zi)가 3월 18일(이하 현지시각) 45세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 아이오와주에 있는 유인원 인지·보존 연구소는 칸지가 보노보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고3월 21일 밝혔다. 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칸지는 심장병으로 치료받고 있었으나, 사인을 명확히 밝혀줄 부검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고릴라 코코에게 수화도 배워
수컷 보노보 칸지는 1980년 10월 28일 조지아주 애틀랜타 에모리 국립영장류 연구센터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여동생 판바니샤(Panbanisha)와 함께 조지아주립대 언어연구소에서 커 오다가 2004년 아이오와주 디모인 대형 유인원 보호소(Great Ape Trust)로 함께 거처를 옮겼다. 이 보호소는 2012년 판바니샤가 사망한 후 동물 학대 논란에 휩싸이며 문을 닫았는데, 2013년 지금의 유인원 인지·보존 연구소로 바뀌었다.
유인원 인지·보전 연구소는 칸지의 부음을 알리며 “동물의 인지능력과 의사소통을 이해하는 데 혁명을 일으킨 특별한 존재였다”고 밝혔다. 칸지는 생전 미국에서 ‘타임’과 뉴욕타임스(NYT),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칸지는 어릴 때 에모리 영장류 연구 센터에서 양어머니인 마타타(Matata)와 함께 인간의 언어를 배웠다. 마타타는 수업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린 칸지는 달랐다. 추상적인기호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구어체 영어를 이해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보노보는 신체 구조상 사람처럼 발성할 수 없다. 대신 영장류학계는 1970년대부터 침팬지와 보노보의 사고와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기호 렉시그램(lexigram)을 사용했다. 칸지가 렉시그램 300개를 배워 소통할 수 있는 단어는 3000개에 달했다.
연구진은 칸지가 여덟 살이었을 때 두 살배기 아기와 같이 660가지 음성 지시를 하고 이해하는지,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여기서 칸지는 아기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였다.
칸지는 언어능력 외에도 석기를 만들고 사용해 ‘천재 보노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기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돌을 깨뜨려 박편(剝片)을 만들고 그 석기로 끈을 잘랐다. 성냥으로 불을 피우고, 그 불에 음식을 꿰어 구워 먹기도 했다. 나중에 칸지는 비디오게임도 배웠다. 그는 아케이드 게임 팩맨의 이기는 방법을 이해하고, 마인크래프트의 최종 보스를 물리쳤다.
고릴라 코코에게 수화도 배워
인간과 대화하는 능력으로 칸지만큼 유명했던 또 다른 유인원이 있다. 칸지가 기호로 영어를 배웠다면 고릴라 코코(Koko)는 수화(手話)를 통해 사람과 간단한 의사소통을 했다. 코코는 2018년 6월 19일 46세로 사망했는데, 코코를 연구했던 미국 고릴라재단은 “생전 코코는 종(種)간 소통과 공감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세계인을 감동시켰다”고 했다.
코코는 1971년 7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서 태어났다. 서부 저지(低地) 고릴라 암컷 코코는 태어난 이듬해 스탠퍼드대 동물심리학자 프랜신 패터슨(Francine Patterson) 교수에게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코코는 수화로 단어 1000여 개를 표현할 수 있었고, 2000여 개의 영어 단어를 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수화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에 접속, 사람과 ‘나는 음료를 좋아한다(I like drinks)’ 같은 영어 문장으로 대화했다.
코코가 TV 방송에 출연해 사람과 수화로 대화하는 장면은 고릴라를 비롯한 유인원의 언어·인지 능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패터슨 박사는 “코코는 거친 야생동물로만 알려진 고릴라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 고릴라 보존 노력에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코코는 동물이 꿈을 꾼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제시했다. 코코는 생전 수화로 꿈을 설명하듯 실제 경험하지 않은 환상적인 일이나 사람, 장소를 자주 표현했다. 코코의 짝이었던 수컷 마이클은 어릴 때 밀렵꾼에게 가족을 잃었다. 마이클 역시 종종 잠에서 깨자마자 수화로 “나쁜 사람들이 고릴라를 죽인다” 고 했다. 악몽(惡夢)을 꾼 것이다.
채식주의자 고릴라, 평화주의자 보노보
보노보와 고릴라는 오랑우탄과 함께 사람과(科)로 분류되는 대형 유인원이다. 생김새와 다른 특징을 가진 점도 비슷하다. 우선 고릴라는 근육이 우락부락하지만 채식주의자다. 건드리지 않으면 다른 동물을 사냥하지 않고 늘 풀만 뜯는다.
보노보도 침팬지처럼 생겼지만, 종(種)이 다르다. 침팬지에서 250만 년 전에 갈라져 별개로 진화했다. 인간은 그보다 앞서 침팬지와 공동 조상에서 500만 년 전 갈라졌다.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가 보노보의 유전자를 해독했더니 그와 같은 진화 경로를 그대로 보여줬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유전자 99.6%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사람과는 98.7%가 같았다. 사람은 침팬지와도 그만큼 유전자를 공유한다. 하지만 보노보와 침팬지는 행동과 성격 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침팬지는 공격성으로 악명이 높다. 무리 지어 큰 소리를 내면서 나무에 있는 원숭이를 위협한다. 공포에 휩싸인 원숭이가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지면 몰려들어 뜯어 먹는다.
반면 보노보는 식물과 곤충을 먹는 잡식성이고 어쩌다 작은 동물을 먹기도 하지만 의도적인 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또 낯선 이에게 음식을 나눠줄 정도로 친절하고 성관계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습성이 있어 ‘히피 침팬지’로 불린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은 침팬지와 같고,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은 보노보에 가까운 셈이다.
세상을 떠난 보노보 칸지는 생전 코코가 나온 비디오를 보고 수화를 익혔다고 한다. 만약 칸지가 저세상에서 코코를 만나면 수화로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둘이 수화로 기억할 사람은 그들에게 말을 가르친 선량한 과학자일까, 아니면 친구들을 해쳤던 사냥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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