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대행 물러나겠다" "안 된다" 그날 국회에 무슨 일이...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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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시대극 <제2공화국> 제14회 |
ⓒ MBC |
그래서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라는 헌법 제49조에 따라 재판관을 선출하면 된다. 그런데도 한덕수 권한대행과 최상목 전 권한대행은 의결정족수 충족에 더해 여야 합의까지 요구했다.
헌법은 신라의 화백제도나 국제무역기구(WTO)의 컨센서스 방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권한대행에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여야 합의까지 요구하며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덕수 대행과 최상목 전 대행은 상대방에게 여야 합의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는 여야 합의 정신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국정 수행에서는 그런 정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국정을 안정시켜야 할 권한대행체제가 여야 불협화음을 조장하며 도리어 국정을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권한대행 해달라고 설득한 여야 의원들
두 대행이 갖추지 못한 것이 1989년 10월 15일 방영된 MBC 시대극 <제2공화국> 제14회에 나온다. 드라마가 시작한 지 7분쯤 되면 이승만의 하야 성명으로 권한대행이 된 직후에 허정 외무장관(수석국무위원)이 국회부의장실에서 여야 지도자 9명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자리에서 우양(友洋) 허정은 권한대행을 맡을 수 없다며 "나는 이 대통령 손으로 임명된 사람인데 그분이 실정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마당에 나도 함께 물러나는 것이 도의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온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힌다.
폭탄 선언에 당황한 여야 지도부는 '외무장관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권한대행을 하도록 돼 있으니 당신이 당연히 맡아야 한다', '이 상황에서 당신이 맡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취지의 말들을 하며 허정의 뜻을 꺾으려 한다.
그래도 허정은 요지부동이다.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 저는 이만 물러가겠다"라고 말한 뒤 벌떡 일어선다. 팔을 붙들며 만류하는 참석자들의 요구에 눌려 다시 착석한 그는 "지금 와서 주어진 임무를 포기한다면 우양은 후일에 국가와 민족보다는 이 박사 개인의 추종자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라는 경고성 발언을 듣고 태도를 누그러트린다.
위 드라마 장면은 하야성명 당일인 1960년 4월 26일 오후의 실제 상황을 거의 그대로 묘사한다. 1980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비화 제2공화국' 제17회에 따르면, 그날 이재학 국회부의장실에서는 위 드라마 속의 9명보다 훨씬 많은 정치인들이 허정에 대한 설득 작업을 펼쳤다.
이승만의 퇴진 성명이 오전 10시 20분에 발표된 그날 오후, 허정 권한대행은 자유당 소속인 이재학 부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임 의사를 밝혔다. 깜짝 놀란 이재학은 허정에게 "빨리 국회로 좀 나와달라"고 요청한 뒤 '포스트 이(李)' 문제를 협의하자며 여야 지도자들을 급히 불렀다.
기사에 따르면, 최소 17명이 불려 갔다. 민주당에서 최소 7명, 무소속에서 최소 3명이었다. 민주당 측 참석자 중에는 5월 2일 민의원의장이 되고 제2공화국 헌법 발효일인 6월 15일에 대통령권한대행이 될 곽상훈도 있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의 주역으로 활약할 2선의 이철승 의원(38세)도 있었다. 또 1985년부터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이끌게 될 초선의 이민우 의원(당시 45세)도 있었다.
여야 의원들은 대행직을 완강히 거부하는 허정을 상대로 "정부의 공백 상태를 우려, 그에게 과도정부 담당의 수락을 되풀이 요청했다"고 위 시리즈는 말한다. 결국 의원들은 "그러면 밤새 좀더 생각해보겠다"는 허정의 답변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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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허정 |
ⓒ 위키미디어 공용 |
이는 그가 여야 합의라는 외양을 갖추고 직무수행에 나서는 발판이 됐다. 그래서 그는 굳이 여야 합의를 운운하며 야당과 갈등을 빚을 필요성이 별로 없었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4·19혁명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그것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데 그쳤다. 거기다가 3·15 부정선거 관련자와 자유당 핵심부에 대한 처벌을 지연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허정 대행체제는 그런 한계를 갖는 동시에, 비상시국을 무난히 이끄는 일에서는 성과를 거뒀다. 오늘날까지도 '대통령 권한대행' 하면 허정이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다.
그가 과도 체제를 무난히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여야 합의에 따른 직무 수행의 외양을 갖춘 데도 기인한다. 허정과 야당의 무난한 관계는 6월 15일의 헌법 개정이 여야 합의로 처리된 데서도 나타난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헤드라인은 출석의원 211명 중 208명이 내각제 개헌안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내용이었다. 직전 선거인 1958년 5·2 총선 때 자유당은 233석 중 126석을 차지했다. 1960년 6월 15일의 개헌은 자유당의 동조와 여야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개정 헌법의 부칙에는 "이 헌법 시행 당시의 수석국무위원과 국무위원은 이 헌법에 의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간주하며, 전항(前項)의 국무총리가 선임될 때까지 이 헌법에 의한 직무를 집행한다"라는 조문이 들어갔다. 제2공화국의 첫 번째 총리 선거가 있을 때까지 허정 수석국무위원이 총리직을 수행한다는 이 조문은 야당이 허정을 불신하거나 혐오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위 조문에 따라 6월 15일부로 제1공화국 대통령권한대행에서 제2공화국 임시국무총리로 바뀐 허정은 그날 새로운 권한대행이 된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8일 만에 사퇴함에 따라 또다시 권한대행에 취임해 8월 8일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이 역시 야당과의 무난한 관계를 반영한다.
박정희 군정기인 1963년에 허정이 윤보선·김병로 등과 함께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고 대통령후보까지 된 것도그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야 합의의 외양은 1960년의 과도정부와 정치권이 4월혁명기의 비상시국을 수습하는 밑바탕이 됐다.
여야 합의를 야당에 요구하기 전에 그 자신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은 군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상대방에게만 합의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 같은 비상시국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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