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승의 글로벌 이슈진단]"한국, 이제는 우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2025. 3. 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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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 전쟁의 한국 외교 시사점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지 유럽의 한 전장에서 벌어지는 무력 충돌이 아니다. 이는 전후 국제질서의 토대를 흔드는 지각 변동이자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 중견국 외교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묻는 역사적 시험대다.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예감해야 하며, 그 안에서 한국 외교의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자강(自强)과 우방과의 연대, 전략적 자율성과 현실주의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외교 역량이 지금만큼 절실한 시기는 없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벌인 백악관 설전은 트럼프 시대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UPI=연합뉴스]


Q.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평화론은 무엇인가?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론은 갈등의 근본적인 해소라기보다 전쟁을 '정지'시키는 정치적 타협에 가깝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이든의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물려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거래 가능성,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관계 등도 포함된 이 접근은 전쟁의 정의나 책임보다 분쟁 관리와 부담 축소에 방점이 찍힌 현실주의 전략이다. 외교를 국가 간 이익의 교환으로 보는 시각에서 트럼프의 방식은 불확실한 평화 대신 관리 가능한 '정지'를 선택하려는 실용적 계산으로 읽힌다.
이런 전략은 단지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미국 내 전쟁 피로감과 실익 중심 외교를 요구하는 국내 정치환경과도 맞물려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이 우크라이나 주권을 유보하거나 동맹의 신뢰를 흔드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갈등의 '정지'는 가능하겠지만 그 평화가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는가에 따라 향후 국제 질서의 안정성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 트럼프 평화는 전쟁의 정지
전후 국제질서에 지각 변동
자강과 우방국 연대 더 절실
러시아엔 유연한 접촉 필요

Q. 트럼프는 러시아와 손잡고 다극 체제를 형성하려는 것인가?
=트럼프가 다극 체제를 수용하고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주장은 나토(NATO) 회의론, 우크라이나 불(不)개입주의, 푸틴과의 거래적 접근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의 외교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연대라기보다 중국 견제를 위한 전술적 활용에 가깝다. 푸틴은 거래 가능한 상대로 간주되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대해서는 일관된 강경 노선을 유지해 왔다. 러시아는 균형 잡힌 다극 질서의 동반자가 아니라 지정학적 경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에 가깝다.
트럼프는 질서를 설계하는 전략가라기보다는 힘의 배분을 유리하게 조정하려는 협상가다. 그는 국제기구와 동맹을 공공재가 아닌 협상 수단으로 보고, 규범보다 전략적 유연성을 중시한다. 다극화는 받아들여야 할 현실일 뿐 제도화할 비전은 아니다. 그가 선호하는 세계는 예측 불가능성과 경쟁의 유동성 속에서 미국이 계속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불안정하지만 유리한 '전술적 유동 질서'다.

Q. 우크라이나 지원은 실익이 있나?
=우크라이나 지원을 둘러싼 회의론이 존재하지만 이는 단기적 비용 논리에 치우친 시각이다. 우크라이나 재건은 주요 7개국(G7),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참여하는 글로벌 공공재로 제도화되고 있으며, 한국은 1조원 규모의 공여와 MOU 체결로 선도적 입지를 확보한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다. 핵심은 원전·디지털·건설·방산 등 경제·기술 신뢰를 기반으로 한 파트너십 구축에 있다.
반면, 러시아 점령지에 대한 성급한 접근은 국제법을 훼손하고 신뢰 자산을 잃을 위험이 있으며, 과거 일본의 크림반도 사례가 교훈이 될 수 있다. 외교는 수지타산의 게임이 아니라 국제적 책임과 신뢰를 장기적으로 축적하는 전략이어야 한다.

Q. 한국은 자강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강 없는 동맹'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외부 지원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초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내재화된 방어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 외부의 지원은 언제든 정치적 판단에 따라 축소되거나 철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강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자강은 단지 선언이 아니라 실제 작동 가능한 체계여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이후 일본·호주 중심의 인도·태평양 안보 재편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치가 유동화될 수 있다는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독자 핵무장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만 그것이 한미 동맹에 미칠 부작용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 필요한 자강은 동맹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동맹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실질적 기반이다. 통합 억제력, 자율적 정찰·감시 자산, 독자적 지휘통제 능력은 한국의 안보 주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며, 이것이 갖춰져야 비로소 외교도 전략적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지난 21일 일본 도쿄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만난 한·중·일 외교장관들. 왼쪽부터 조태열 외교장관, 이시바 총리, 왕이 중국 외교부장,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 [외교부 제공=뉴시스]

Q. 한국의 우방은 누구인가?
=동맹이 균열하는 전환기 속에서 한국은 유사시 미국 외에 실제 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파트너가 누구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해 있다. 일본, 호주, 일부 나토 국가들과 전략 대화 채널은 존재하지만 한국 방어를 전제로 한 구조화된 협력 메커니즘은 사실상 부재하다.
나토+인도·태평양 4개국(IP4) 구상이나 글로벌 파트너십 확대는 다자 안보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트럼프 체제에서 나토의 결속력마저 흔들리면서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국은 미국과의 전략적 마찰 시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외교적 동심원은 선언이 아니라 스스로 유지 가능한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
우방의 조건은 더 이상 '가치 공유'가 아니라 '이해 공유'다. 한국의 안보 환경과 실질적 연계성을 갖고, 위기 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할 의지가 있는 파트너만이 전략적 우방이 될 수 있다. 일본은 역사 문제와 정치적 제약으로 조건부 파트너에 머물고 있다. 호주와 인도는 인도·태평양 구도에서 중요하지만 한반도 유사시 개입 여지는 제한적이다. 유럽 주요국 역시 전략자산은 있으나 동북아 위기를 우선순위에 둘지는 불확실하다.
한국은 한미 동맹을 중심축으로 하되, 방산·정보·경제안보를 아우르는 다층적 우방 체계를 설계해야 하며,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Q. 러시아·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은 단절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거리 두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북·러 간 군사협력이 전면화되면서 한국 외교에서 러시아는 사실상 주변화되었지만, 북핵 대응과 안보환경 재편 과정에서는 여전히 일정한 관여가 불가피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상징성을 피한 경제 및 문화 교류 중심의 비정치적 채널 유지, 정책 대화선 복원, 저강도 수준의 전략적 접촉면 확보다. 이는 미래 협상의 여지를 남기는 외교적 안전판이 될 수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분야별 전략적 자율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 사드 사태 이후 한·중 관계는 구조적 경색에 빠졌고, 미·중 전략 경쟁은 한국의 입지를 제약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주요 무역국이자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안보·군사 영역에서는 미국 중심 체제를 유지하되, 통상·환경·에너지 등 비(非)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복원이 필요하다. 특히 지방정부, 기업, 학술 네트워크 등 민간 기반의 저강도 교류는 고위급 외교보다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한국은 중·러와 동맹이 될 수 없지만 적대적 고립을 유지할 수도 없다. 단절된 대화와 조율 불가능한 위기 구조는 외교 리스크를 키우는 핵심 변수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공식 채널을 보완하는 조용하고 유연한 접촉 경로, 즉 '스텔스 외교 전략'이다. 강한 동맹만큼이나 균형을 잃지 않는 전략적 여유 공간이 국가 생존의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러·우 전쟁이 보여주고 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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