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우》, ‘인간’ 대사가 없는 영화가 선사하는 풍부한 감흥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5. 3. 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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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에 영광을…‘골리앗’ 픽사도 밀어내
애니메이션계 ‘성공의 문’ 연 《플로우》의 메시지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인구가 187만 명에 불과한 동유럽의 작은 나라 라트비아.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나라라는 점 외에는 라트비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 없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건 현대 영화의 고전 중 고전으로 불리는 《전함 포템킨》을 만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고향이라는 것 정도였다. 독일 태생 작곡가 바그너에게 예술의 사상적인 동기를 부여한 도시라고도 했던가. 그러고 보니 심수봉이 국내에 번안해 부르면서 큰 사랑을 받은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이 라트비아 가요라는 것도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 한 가지 정보를 추가하게 됐다. 고국에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플로우》와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나라.

영화 《플로우》 포스터 ⓒ판씨네마㈜

의인화되지 않은 동물들

실제로 《플로우》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라트비아의 국가적 자랑이 됐다. 2억 달러 이상을 투입한 거대 스튜디오 픽사(《인사이드 아웃2》)와 드림웍스(《와일드 로봇》)와의 경쟁에서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반응은 더욱 뜨겁다. 《플로우》의 제작비는 370만 달러(약 53억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거머쥔 결과다. 오스카 트로피는 라트비아 예술박물관에 전시됐고,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자유기념비 앞에 《플로우》 속 고양이 모습을 구현한 설치물까지 들어섰다고 한다. 《기생충》의 영광을 경험한 우리로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플로우》의 출발선에 《아쿠아》(2012)가 있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만든 7분짜리 단편영화 《아쿠아》는 물을 무서워하는 고양이가 홍수를 만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아쿠아》가 뿌린 씨앗이 흐르고 흘러 85분 버전으로 더 크게 만들어진 열매가 바로 《플로우》다.

인간의 흔적은 있지만, 인간은 사라진 세상.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숲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대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빈집에 홀로 남아있던 검은 고양이는 물이 차오르자, 필사적으로 높은 곳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위기의 상황. 마침 배 한 척이 떠내려오고, 고양이는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 위기를 모면한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배 위에는 푸짐한 인상의 카피바라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흘러가는 배엔 탑승객이 늘어간다. 개떼에서 낙오된 골든리트리버,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뱀잡이수리, 여우원숭이가 하나둘 배에 탑승하면서 뜻하지 않은 동행이 시작된다.

대사 없는 영화로 알려져 있는 《플로우》는 엄밀히 말해 대사가 없지는 않다. 인간 기준에 맞춘 의인화된 언어가 없을 뿐, 동물들은 실제 자신들의 소리를 낸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방대한 양의 동물 라이브러리를 참조하고, 실제 동물 소리를 녹음했다. 언어뿐 아니라 행동도 의인화되지 않은 게 여타의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 《플로우》의 특징이다. 가장 먼저 세운 계획이 '동물을 동물답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는 감독은 과장과 인위성을 배제하고 캐릭터들이 최대한 실제 동물처럼 보이도록 신경 썼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플로우》는 물론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전작 《어웨이》(2021)에서도 무성영화처럼 대사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킨 바 있다. 덕분에 그의 영화는 1인치의 장벽을 허물 필요도 없이 보편성을 늘 확보한다. 지난해 개봉해 서서히 입소문을 탄 스페인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 역시 대사 한 줄 없이 깊은 여운의 감정을 전달할 바 있다. 무릇 훌륭한 애니메이션은 무성영화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무언의 소통이 주는 감흥은 힘이 세다.

영화 《플로우》 스틸컷 ⓒ판씨네마㈜

경험을 받아들이는 영화

《플로우》의 거의 모든 장면은 고양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고양이가 여러 동물과 맺는 상호작용이 중요하게 그려진다. 이 중 특히나 눈길을 끄는 건 뱀잡이수리와 고양이의 관계다. 홍수에 떠밀려 배에 올라탄 다른 동물들과 달리 뱀잡이수리가 여정에 합류한 계기는 다르다. 뱀잡이수리는 혼자가 된 고양이가 딱해 생선을 나눠주는가 하면, 동료 뱀잡이수리가 고양이를 위협하는 걸 막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고양이를 위해 한 행동은, 무리의 질서를 해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 죄로 무리에서 퇴출되면서 뱀잡이수리가 고양이의 여정에 합류한 것이다. 뱀잡이수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과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연의 위엄을 보여준다면, 고양이와 뱀잡이수리가 연대해 나가는 모습은 종이 다른 존재들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일러준다. 전자든 후자든 묵직한 감흥을 전한다.

대사가 지워진 자리를 든든하게 채우는 건, 다채로운 카메라 기법으로 연출된 풍경과 풍부한 사운드와 은유들이다. 이 영화에서 홍수는 동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도록 그들을 일깨우는 통로로 기능한다. 물을 그토록 무서워하던 고양이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건져오고, 그 물고기를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통해 인간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굳이 은유나 상징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관객이 퍼즐을 풀어야 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플로우》가 의미를 찾는 영화가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영화로 다가가길 원한다"고 말한 감독의 의중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몸을  그냥 맡기면 된다. 수채화 같은 몽환적인 색감, 수면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시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각본부터 작화까지 감독 개인이 모든 걸 컨트롤한 1인 작업물 《어웨이》와 달리 《플로우》는 협업을 통해 탄생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았던 만큼 벅찬 부분도 있었을 터다. 여기엔 독립 애니메이터들과 아마추어 애니메이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료 오픈소스 3D 그래픽 툴인 '블렌더(Blender)'가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고가의 기술을 보유한 거대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고도 훌륭한 작품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스튜디오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창작자들에게도 성공의 문이 열려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한 '버라이어티'의 의견은 뺄 것도 보탤 것도 없이 명확하다. 《플로우》의 오스카 수상이 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애니메이션 전반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다.  

그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을 질발로디스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거머쥐고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남겼다. "이 수상이 전 세계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고,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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