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사람만 아는 감정... 바둑 영화서 배우는 인생의 묘수

장혜령 2025. 3. 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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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승부>

[장혜령 기자]

 영화 <승부> 스틸컷
ⓒ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총과 칼을 들지 않았지만 두뇌 싸움이 난무한 세계, 무림고수의 소리 없는 전쟁터가 바둑이다. 영화 <승부>는 이러한 바둑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두 인물 조훈현과 이창호를 스크린으로 소환했다. 특히 1990년대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와 CG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실화의 큰 줄기는 훼손하지 않고 유지하되, 타임라인에 어긋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냈다.

조훈현을 연기한 이병헌은 머리 스타일부터 표정까지 실존 인물로 분해 승부사 기질을 선보인다. 공격력과 추진력, 스피드로 '제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기질을 제대로 복사했다. 평소 흰 한복을 즐겼던 스타일이나 실내 흡연, 상대의 평정심을 흔드는 다리 떨기, 허밍 등 시그니처 장면은 웃음을 유발한다. 어린 시절의 쾌활함 대신 내면의 깊이감이 커진 이창호를 맡은 유아인은 내내 진중한 태도로 뚝심을 지킨다. 바둑의 전설과 연기의 전설이 만나 활보하는 모습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국내 최초 우승자가 된 조훈현(이병헌)은 바둑 신동이라 불리는 이창호(유아인)을 제자로 맞는다. '호랑이 새끼를 데려다 키웠다'는 세간의 말에도 신경 쓰지 않고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며 모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최소 10년은 걸릴 거라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승부를 가릴 시간이 다가왔고 뻔한 예상을 뒤엎고 제자에게 반집 차이로 패한다. 낯선 충격도 잠시. 조훈현은 곧 슬럼프에 빠진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만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다시 절치부심해 정상의 자리를 탈환할 날을 손꼽는다.

영화는 실화에 기반을 둔 철저한 고증, 서사의 연결과 극적 재미의 앙상블로 눈길을 끈다. 일상생활에 자주 쓰이는 단어인 복기, 사활, 세력, 실리, 국면, 미생, 장고, 자충수 등 반가운 단어가 튀어나와 놀라움을 준다. 바둑을 모른다고 해도 배우의 팽팽한 연기력에 빠져 감상하는 데 지장은 없다.

다만 알고 본다면 훨씬 풍부한 재미를 배로 얻어 갈 수 있다. 19줄 바둑판을 인생의 축소판이라 부르는 이유도 361개인 착점(바둑돌을 두는 것)이 1년인 365일과 비슷한 이유다.

영화는 '청출어람'과 '심기일전'을 화두로 삼고 성장담을 펼쳐 낸다. '지는 해'와 '뜨는 해'의 대비를 주목해 따라간다. 둘의 관계성은 스승과 제자라는 타이틀을 떼고 서로를 논할 수 없다. 나이와 경력을 떠나 진정한 맞수, 동료로서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도록 설계했다. 성격과 바둑 두는 스타일은 반대였지만 바둑을 향한 뚝심은 한결같이 유지되는 점을 중심에 뒀다.

조훈현은 실패를 인정하고 '심기일전'하며 복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와 같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을까. 언론에서는 대국 중 반쯤 드러누워 다음 수를 생각하는 모습을 '와기'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실제는 정신과 몸이 분해돼 버릴 듯한 스트레스로 지친 중년 바둑 기사의 침몰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일류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본 사람만이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뜨거운 태양 앞에 녹아내린 열패감을 다스리는 묘수를 기어코 찾아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지더라도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투지, 성숙한 패배와 끈질긴 노력을 들이민다. 정답이 없는 삶의 오묘함, 끝까지 예의를 지키는 바둑의 태도는 변함없는 공감 요소로 충분하다.

영화의 또 다른 재미 요소
 영화 <승부> 스틸컷
ⓒ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스승의 거침없는 승부 기질과 포부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바둑을 찾는 수제자 이창호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석불이란 별명답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바둑'을 할 거라는 다짐은 스승의 훈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바둑판 위에서 승부를 겨룬다. 오늘 실패하면 내일 이기면 되는 것, 끝나지 않는 인생의 승부는 도전정신을 통해 가까이 다가온다.

4년씩이나 빛을 보지 못한 영화지만 트렌드를 타지 않는다. 가장 큰 이슈였던 유아인 리스크는 영화의 몰입엔 큰 지장이 없다. 워낙 말수가 없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이창호의 성정을 정적인 행동과 굵은 눈빛으로 표현했다. 편집을 할 수 없는 분량과 존재감으로 이병헌과 함께 손색없는 연기를 펼친다. 어린 이창호를 연기한 김강훈도 눈에 띈다. 어릴 때는 호기심 많고 쾌활한 애어른의 면모를 보였지만, 남의 집 살이가 계속되고, 사춘기가 찾아오고, 수많은 어른과 바둑을 두며 변한 조숙한 성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상황을 주목할 만하다. 배우 리스크로 난항을 겪었던 <소방관>을 심폐소생한 투자배급사 '바이포엠 스튜디오'은 주목받지 못한 < 히트맨 2 >까지 연이은 홈런으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바이럴 마케팅 회사에서 영화 투자배급사로 영역을 넓힌 '바이포엠 스튜디오' 승부수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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