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뛴다고? 평생 상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남산서 뛰기 시작해 지난해 장애인체육대회 '은메달' 딴 선지원 러너(35)
"잘하고 싶은 마음 누구나 있지만, 그걸 위해 돈과 시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
2017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건만 선지원씨(35)는 이를 뚫고 남산에 가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던진 말이 마음에 작은 불을 지펴서였다. 이런 내용이었다.
"뛰는 건 돈도 안 들고 좋잖아. 남산에 가면, 시각장애인들이 달릴 수 있대. 가봐."
뛴다고? 뛰는 걸 상상해본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원씨가 그간 강요받은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수동적으로 살라고, 그래야 한다고. 누구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어느 범위 안에서만 살아야 하고. 그런 한계가 당연했던 삶.
저벅저벅, 슥슥슥, 탁탁탁. 일정하게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평생 한 번도 내어본 적 없는 경쾌한 발소리였다. 쿵쿵쿵, 그걸 들은 지원씨의 심장이 뛰었다. 설레는 두근거림이 아니라 두려움이 더 컸다.
아마추어 육상 감독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원씨에게 걸어보라고 했다. 걸었다. 살살 뛰어보라고 가이드를 해줬다. 생애 처음으로 뛰어보는 것도 했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게 너무 어려웠고, 정신없이 엉망으로 뛴 것 같았단다. 그러나 감독은 그에게 이리 말했다.
"가르치면 정말 잘 뛰겠어, 언젠가는."
어릴 적부터 별로 칭찬받아 본 적 없다던 지원씨는, 잠재력에 대한 이야길 들은 게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제대로 뛰고 싶어졌다.
계기가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 때 힘든 업무로 매일 밤 11시에 퇴근했다. 악착같이 살아야 잘 사는 거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최저시급이 5580원. 꼬박 한 달을 열심히 일해서, 100만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을 받아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월세, 공과금 등 고정 지출을 다 빼니 뭐든 다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세끼를 라면만 먹었다. 갑자기 폐결핵에 걸려, 체중이 8kg이나 줄었다. 몸이 아프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기 위해 운동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요가 같은 걸 등록하려 했다. 헬스장 10곳을 갔으나 모두 '거부' 당했다. 위험하단 말이 가장 많았고, 심한 경우엔 받아줬다가 손님 떨어진단 얘기까지 들었다.
아무리 돈을 내고 운동하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그날 있었던 거절과 차별이, 지원씨를 더 크고 넓은 어딘가로 강하게 이끌고 있었다.
이를 '가이드러너'라 부른다고 했다. 통상 가이드러너가, 시각장애인 러너보단 조금 더 잘 뛰어야 한다. 그래야 길잡이를 하면서도 여유롭게 맞춰갈 수 있으므로.
지원씨 곁에도 훌륭한 가이드러너가 있었다. 그가 직접 소개했다. 장지은씨라고 했다.
"8년 정도 함께한 것 같아요. 남산에서 만났고요. 성격이랑 스타일 같은 게 되게 잘 맞았어요. 함께 뛰는 2시간 동안 수다도 참 많이 떨었지요. 언니도 덕분에 성장했다고 해요. 너랑 같이 안 뛰었으면, 그냥 집에 있었을 것 같다고."
둘이 어떻게 뛰냐면, 지원씨가 반 발자국 정도 앞서서 뛴단다. 그래야 시각장애인 러너가 주도하면서, 가이드러너가 정확하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고. 2인3각처럼 팔과 다릴 맞추는 거다.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직선인지 코너인지, 방지턱이 있는지 없는지,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지 알려준다.
그러려면 시각장애인 러너와 비장애인 러너를 연결하는 '끈'이 필요하단다. '트러스트 스트링(믿음의 끈)'이라 불린다고. 단거리는 길이 30cm, 장거리는 60cm 정도 되는 이 끈이 있기에, 달릴 수 있다고 했다.
수년을 해도 호흡이 잘 안 맞을 수도 있고, 처음 함께 해도 호흡이 잘 맞을 수 있다고.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
"뛰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일상의 스트레스를, 내 땀과 함께 버리겠다. 그러면 다음 한 주를 살아갈 힘이 생기더라고요. 아무 생각도 안 들거든요. 언제 끝나나, 그 생각 말고는요(웃음)."
같은 회사 팀원이 여섯이었는데, 그들이 문득 의아해했다. 똑같이 힘든 일상인데 어떻게 잘 견디느냐고. 달리기를 이야기했더니 "정말 대단하다"며 부러워했다. 부러워하면서도 그처럼 뛰는 이는 없었다.
지원씨가 지난 이야기를, 아무렇잖게 툭툭 털어놓았으나 중간중간 궁금한 게 꼬릴 물고 생겼다. 상상했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고, 뛰다가 넘어진다. 다시 뛰기가 두려울 것 같았다. 어디서든 또 넘어질 수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넘어가는 걸까. 어떤 마음으로 또 뛸 수 있는 건가. 무섭지 않은 걸까.
지원씨가 대답했다.
"많이 무서웠죠. 예전엔 한 번씩 넘어지고 나면, 그 길로 집이나 병원에 갔었어요. 근데 그렇게 멈추니까, 심리적으로 다시 그 자리로 나가는 게 더 두렵더라고요. 웬만하면 좀 다쳐도 바로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다음날 다시 뛸 수 있더라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육상선수 생활을 그만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명현 감독은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어, 그 길로 강남에 있는 런콥 훈련센터에 갔다. 명현 감독은 지원씨가 뛰는 걸 보더니 "10km에 46분까진 뛸 수 있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뭔지 묻자 그가 답했다.
"몸이 일단 가볍고, 자세만 조금 조정하면 괜찮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뛰면서 아픈 이유도 자세란 생각이 들었고요. 또 지원씨의 되게 큰 장점이, 성실해서 자기 관리를 잘하는 거거든요. 마라톤은 원초적인 운동이라 잘 먹고 잘 자고 그런 게 잘 돼야 하니까요. 그러면 좋은 기록이 나오겠다 생각했지요."
신용 코치가 지원씨와 밀착해 훈련했다. 지원씨는 반신반의했다. 선천적인 재능도 없고, 밑천은 성실함뿐이라고 여겼다. 꾸준히 훈련하기만 했다. 그가 가장 잘하는 건 그뿐이었다.
지난해 전국 장애인체육대회가 열린 날. 10km 종목에 출전하던 그날까지도 지원씨는 잘할 거란 확신이 없었단다. 아침에 명현 감독이 "날이 덥고 좋은 기록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단다. '오늘 내가 못 해도 그 핑계라도 댈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을 내려놓자 몸이 더 잘 나갔다. 명현 감독과 용욱 코치의 전략대로, 2등을 계속 따라갔다. 레이스 운영을 해보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추월했다가 다시 추월당했을 때, 흥분하지 않고 페이스대로 갔다. 1km를 남기고 추월했고, 그땐 '완전히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속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뛰었던 날. 7km 지점부터는 위경련 증세까지 나타나 몸이 구부러지던 그날.
지원씨는 당당히 2위로 들어왔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못하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채찍질했던 긴장이 와르르 풀려서였다. 그날은 가이드러너인 지은씨의 생일이기도 했다.
"성격이 순종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혼자 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요.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도움 받는 걸 안 좋아했던 것 같아요. 모르는 길도 혼자 찾아가 보고, 그런 편이었지요."
그러면서 중학생 때 얘길 들려주었다. 지하철 선로에 처음으로 떨어졌단다. 괜찮았느냐고 흠칫 놀랐더니, 실은 살면서 무려 네 번이나 떨어졌다고 했다. 가족들도 모르는 얘기라며 지원씨는 웃었다.
다시 나가기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무서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또 나갔느냐고 했다. 지원씨가 말했다.
"무서우면 이제 아무것도 못 하겠구나, 동네밖에 못 놀러 다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꼭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걸 못 해내면 다음은 없는 거니까요."
그게 맞았다. 배를 띄워 나아가는 용감한 탐험에 풍랑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걸 당연히 여겨 또 나아가는 거였다.
그 차이는 실로 큰 거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지원씨에게 물었다. 그리 성장하는 비결이 있느냐고. 지원씨가 솔직하게 다 알려줬다. 집은 서울 면목동인데, 압구정동까지 개인레슨을 받으러 다닌다고. 비결을 들은 그들도 지원씨처럼 성장하게 됐을까.
"너무 다 알려주면 뒤처지겠단 생각까지 했었는데요. 제가 알려드린 대로 그렇게 레슨까지 받고 하는 분은 안 계시더라고요."
이어서 이리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듣고팠던 대답이었다.
"그때 깨달았지요. 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걸 위해 내 시간과 돈과 마음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요. 저는 달리기에 생명을 걸었거든요."
에필로그(epilogue).
꿈은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는 거라 했다. 이미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안다는 지원씨가, 큰 포부는 자신과 실은 안 울린단 그가, 그 꿈을 생각한 이유가 궁금했다. 지원씨가 답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동네 헬스장, 수영장, 이런 데를 자유롭게 드나들고요.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어서요. 어울려서 함께 운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요. 그동안 정말 숱한 차별과 거절을 당했거든요."
드러나지 않은 시각장애인들 중에선 '집에 있는 게 최선'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단다. 그러려면 스스로 좋은 성과를 내고 보여줘야 할 것 같다고.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서.
4월 달엔 첫 풀 코스 마라톤을 앞두고 있단다. 여전히 자신 없어 하는 그에게, 명현 감독이 이리 말했다.
"1년 전에, 그 상태에서 풀 코스 마라톤을 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어요? 선수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해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워낙 잘하고 열심히 하잖아요."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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