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중년 연기할 내가 기대된다" 했는데... 20대 배우 김새론의 꿈, 누가 꺾었나
[이준목 기자]
▲ JTBC 조선청춘설화 <마녀보감>에서 저주로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마녀가 된 비운의 공주 서리 역을 맡은 배우 김새론이 2016년 7월 29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한때 '천재 아역배우'로 주목받으며 한국 영화의 차세대 기대주로 꼽혔던 배우 김새론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16일 오후 김새론은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지인에 의해 발견됐다. 향년 24세.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이나 범죄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며, 고인은 특별한 유서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민국 최연소 칸 진출 배우
2000년 7월생인 김새론은 출생후 이듬해인 2001년 잡지 <앙팡> 표지에 출연해 유아 모델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배우로서는 2009년 10월 영화계 거장으로 꼽히는 이창동 감독이 제작한 한국-프랑스 합작 영화 <여행자>로 정식 데뷔했다. 당시 김새론은 100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으며, 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의 감정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내면 연기로 표현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여행자>가 세계적인 영화제인 칸 영화제 공식부문에 초청을 받아 레드카펫까지 밟게 되면서, 김새론은 9살의 나이에 '칸에 진출한 최연소 대한민국 배우'라는 기록을 남겼다. 해외 유력 일간지에서도 비중있게 조명될 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후 김새론은 2014년 개봉한 이창동 제작-정주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도희야>에서 도희 역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이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면서 '10대 이전에만 칸 영화제를 두 번 밟은 최초의 한국 배우'라는 기록도 추가했다.
2010년에는 김새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아저씨>에 출연한다. 여기서 그는 범죄조직에 납치된 히로인 소녀 '소미' 역할을 맡아, 소미를 필사적으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원빈(차태식 역할)과 애틋한 케미를 선보였다. <아저씨>는 6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대성공을 거뒀고, 김새론은 불과 단 두 편의 영화만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아역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김새론은 현대 사회의 그늘에 놓여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어둡고 불행한 소녀'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영화 <바비>, <이웃사람>, <도희야>, <맨홀>, <동네사람들>, 드라마 <눈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역할들을 보면, 납치·살인·가정폭력·인질·성폭력·위안부 징집·재난사고 등 성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고난을 감수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가 청소년 시절에 출연한 영화 중 특별출연과 단편영화를 제외하면 6편이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새론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을 극장에서 직접 관람하지 못하는 웃지못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김새론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출연에 대한 최종결정은 자신이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세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고, 밝은 아이가 있으면 어두운 아이도 있다.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또래 배우들과는 달랐던 작품선택 기준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또한 "힘들어도 누군가 나의 연기를 봐주고 있다는 희열감이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드라마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2011년 MBC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황정음 아역으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천상의 화원, 곰배령>, <패션왕>, <엄마가 뭐길래>, <여왕의 교실>, <마녀보감>, <우수무당 가두심> 등 여러 작품에서 조연과 주연을 넘나들며 꾸준히 활약했다. 비록 드라마에서는 영화만큼의 빅히트작은 없었지만 시트콤, 로맨틱 코미디, 사극을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에서 발랄함과 성숙함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예능에도 종종 출연했다. 2015년에는 MBC의 대표적인 가요프로그램인 <쇼 음악중심>의 MC를 맡았으며, 2020년에는 tvN 관찰예능 <온앤오프>에 출연해 배우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2018년부터 채널A 낚시예능 <도시어부>에 단골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며 아버지뻘 되는 대선배들과 의외의 케미와 예능감을 발산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개봉 앞둔 <기타맨>, 고인의 유작으로...
▲ 배우 김새론(왼쪽)과 배두나가 2014년 3월 20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67회 칸국제영화제의 영화 <도희야> 포토콜 행사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처럼 동세대 배우들 중 손꼽힐 만한 훌륭한 커리어와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순탄하게 '꽃길'만 걸어가는 듯하던 김새론의 운명을 한번에 바꿔놓은 것은, 성인이 된 이후인 2022년 '음주운전 사건'이었다.
김새론은 당시 도심 사거리에서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일으킨 후 미조치 상태에서 도주했다가 적발됐다. 당시 채혈 검사 결과 면허 취소 수치를 훌쩍 넘긴 혈중알코올농도 약 0.2%를 기록했다. 법원은 1심에서 벌금 2천만 원을 선고했고, 김새론 측이 항소를 포기해 2023년 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동안 연기력과 인성 면에서 '성공한 아역배우 출신의 모범'으로 평가받아오던 김새론의 이미지를 한번에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트리거가 된다.
그는 한동안 자숙의 기간을 거쳤지만, 이후 출연 예정작에서 줄줄이 하차해야 했고, 누리꾼과 연예언론,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김새론을 비난하는 내용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이 때문에 김새론은 몇 차례나 연예계 복귀를 타진할 때마다 불발되는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됐다.
어렵게 연기자로 복귀한 이후에도 김새론은 연일 대중의 부정적 여론과 마주해야 했다. 2024년 연극 <동치미>를 통해 2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의 악플과 언론의 비판적 보도가 이어졌고,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김새론은 하루 만에 출연을 포기했다. 올해 5월 음악 영화 <기타맨>의 개봉을 앞두고 있었으나, 이는 고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김새론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한편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겪어야 했던 무분별한 인신공격과 마녀사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물론 음주운전같은 결코 미화나 동정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과 비판 여론이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새론이 겪어야했던 무분별한 악플, 루머, 가십, 사생활 들추기와 모욕주기식 보도 행태들은, 아무리 그녀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과도한 수준이었다.
사실 김새론은 아역 시절부터 너무 이른 나이에 주목을 받으며 항상 대중의 평가와 악플에 쉽게 노출된 상황이었다. 톱스타 원빈과 함께 출연한 <아저씨>로 한창 주목받게 됐을 때, 그의 홈페이지에 찾아와 외모비하와 인신공격성 악플을 퍼붓는 안티팬 때문에 마음고생을 겪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김새론의 나이는 불과 10살이었다.
악플보다 더 심한 황색 저널리즘
▲ 배우 김새론(자료사진)
ⓒ 연합뉴스
김새론은 엄연히 법적으로 처벌을 받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온통 차가운 조롱과 조리돌림식 비난 일색이었다. 이는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에 가까웠다.
모두 김새론을 저격하는 내용으로, 실제 언론에 보도된 기사의 제목들이다. 지금도 검색만 하면 누리꾼의 악플 수준보다도 훨씬 더한 자극적인 내용과 제목의 황색 저널리즘 기사가 넘쳐난다.
유사 언론을 표방하는 일부 '사이버 렉카'들도 김새론 때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특히 유명 연예 유튜버로 알려진 ㄱ씨는 김새론이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유명 BJ와 술자리를 가졌다', '생활고는 거짓이며 사고 후에도 펍에 가서 게임을 즐겼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인 내용들을 보도해 그를 비방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고인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면서 이러한 연예 언론과 유튜브들의 일방적인 여론몰이가 가진 폭력성도 재조명되고 있다.
"배우란 직업을 택한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더 깊이 있는 마음을 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훗날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면 또다른 모습의 연기를 할 나 자신이 기대된다. 나중에 언젠가는 영화관을 빌려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청해 내 데뷔작부터 모든 출연작을 순차적으로 상영하며 내가 성장해온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
김새론이 생전에 인터뷰에서 남긴 포부였다. 안타깝게 그의 소망은 끝내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게 됐다. 김새론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뒤늦은 애도와 추모, 동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다.
한 사람이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받고 성장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일방적인 비난과 조롱 속에서 매장하며 극단적으로 몰아넣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