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 선생은 싫어하겠지만...이건 꼭 말해야겠습니다
[오길영 기자]
내란 수괴가 드디어 파면되었다. 역사의 정말 힘든 고비를 넘긴 느낌이다. 이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 다들 그렇겠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내란 스트레스로 나도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그 이유 중에는 내 주변에서도 그동안 멀쩡해 보이던 이들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흑화(黒化)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 것도 있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봤다. 일본어 '쿠로카(黒化,くろか)'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일본 대중문화 매체에서 선량했던 인물이 어떤 계기를 통해 악에 물들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변모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이 한국에 들어와 퍼지면서 성격이 갑자기 이상해지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바뀌는 사람을 두고 쓰는 표현이 되었다.
원래 난세에는 사람의 본색과 바닥이 드러난다. 내란 사태를 거치면서 사람됨이 돋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흑화된 이들도 적지 않다. 내란 세력이 보여준 추잡한 행태에 대해서는 굳이 덧붙일 게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예증하는 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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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한 장면. |
| ⓒ MBC 경남 |
내가 주목한 지점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나는 <김장하>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봤다.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는가? 여러 철학자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했듯이, 인간이 뿌리치기 힘든 가장 강력한 욕망이 인정 욕망(the desire of recognition)이다. 이런 질문을 해보면 된다. 왜 권력, 돈을 얻으려 하는가? 그것들 자체가 주는 매력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들이 알아주는 맛에 우리는 산다. 그 인정이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 혹은 착각한다. 그게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인정 욕망은 힘이 세다.
눈에 보이는 권세나 돈만 그런 게 아니다. 명예 혹은 상징 권력(symbolic power)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나 시인, 혹은 평론가도 다르지 않다. 문학 예술인은 물질에는 초연한 척한다. 혹은 현실적으로 초연할 수밖에 없다. 안정된 수입을 갖고 사는 문학 예술인은 드물다. 대부분 불안정한 수입으로 어렵게 생활한다. 수많은 문학상에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면서도 그 상에 딸려 오는 상금을 생활비로 쓰는 작가, 시인의 사정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돈과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는 이름, 명예는 오래 간다. "문학사에 영원히 새겨질 이름" 운운하는 말이 그걸 보여준다. 나는 욕망이 없다는 언설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도사나 성자를 자임하는 이들은 대체로 사기꾼들이다. 김장하 선생(아래 호칭 생략)을 그렇게 규정하려는 시각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김장하의 행적이 놀라운 것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욕망이 따지고 보면 부질없다는 걸 알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는가, 아니면 무지한가 중에서 선택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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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하동 차밭을 찾은 김장하 선생의 모습. |
| ⓒ 윤성효 |
조금만 내세울 게 있으면 그걸 더 멋지게 포장해야 인정받고, 그렇게 하는 게 훌륭한 처세술로 통하는 세상이다. 드물지만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김장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김장하>를 통해 본인이 널리 알려진 걸 반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시대는 김장하가 보여준 드문 삶의 모습을 이렇게라도 알리는 게 필요하다. 악하고 추잡한 모습만이 눈에 보이고 그런 자들이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좌절감과 우울함이 커지기 때문이다. 내란 사태에서 우리는 그런 한심한 인간 군상을 많이 목격했다.
아름다운 인연이 낳은 소중한 결실
위선과 위악이 득세하는 시대에 드물지만, 시대에 어긋나게 사는 분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위안이 된다. 위안이 된다고 해서 김장하처럼 산다는 게 쉽다는 뜻은 아니다. 원래 "모든 고귀한 것은 극히 드물고 힘들다."(스피노자) 그러나 김장하가 지적하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은 소수의 고귀한 자가 아니다. 고귀한 이들은 본보기가 되지만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이 지탱한다." 잘 되지 못해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장학생에게 김장하가 해준 말이다.
그런 김장하 장학생에는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날인 2025년 4월 4일 11시, 내란 수괴 파면 선고문을 담담히 읽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아래 문 대행)도 포함된다. <김장하>에는 문 대행이 잠깐 나오는데, 그는 김장하에 대해 이렇게 심경을 밝힌다. "선생님은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금의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하며 문 대행은 울컥하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김장하>를 다시 보면서 나도 뭉클했던 장면이다. 김장하와 문 대행이 맺은 인연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다. 2019년 4월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문 대행이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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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이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때인 2019년 1월 16일 진주 경상국립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시민들이 마련한 김장하 선생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했다. |
| ⓒ 유근종 |
"우리는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과 같은 오류를 앞으로 또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도 이번처럼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 나 혼자 한 생각이 아니다. '내란성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1859년에 나온 <자유론(On Liberty)>을 읽고 또 읽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거기에 마치 우리 국민에게 건네는 듯한 말을 써놓았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부터 파면까지,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시민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사람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샜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밀은 우리 국민들이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는 것이다."(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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