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인터미션’ 둔 215분 영화…이유 있는 멈춤 ‘브루탈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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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즘.
오는 3월 열리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는 이민자 라즐로가 건축가로 재기와 좌절을 반복하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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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즘.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Béton brut)라는 어원이 말해주듯 장식적 요소는 철저히 배제된 채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육중함과 단단함,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이 건축 양식은 전후 복구가 과제였던 1950~70년대에 유행했다.
브루탈리스트. 브루탈리즘을 추구하는 건축가. 12일 개봉하는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라즐로(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정체성이다. “주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 양식이었으며, 그 규모와 스케일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다”는 브레이디 코베이 감독의 말처럼, 라즐로는 헝가리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박해에서 살아남아 미국 땅을 밟은 건축가다. 오는 3월 열리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는 이민자 라즐로가 건축가로 재기와 좌절을 반복하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실화 바탕일 것 같지만 허구의 이야기다.
무려 3시간35분에 이르는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첫번째, 그리고 절반 이상의 이유는 브로디의 가공할 연기력이다. 2003년 ‘피아니스트’에서 라즐로와 같은 유대인 예술가를 연기해 20대 때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브로디는 이후 뚜렷한 연기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를 통해 그의 수상이 운이 아니었으며 연륜과 함께 뛰어난 연기력이 한결 더 무르익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엘리트 건축가 출신이지만 가난한 이민자로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시절의 피로함과, 예술적 의지가 부유한 스폰서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시시각각 깨달을 때의 좌절과 분노, 이민자를 향한 미국인들의 무심한 듯 넘쳐나는 조롱에 사무치는 수치심 등 고통의 스펙트럼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연기해낸다. 그는 오스카 전초전으로 일컬어지는 골든글로브에서 이 작품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석탄을 캐며 고된 삶을 살던 라즐로는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반 뷰렌(가이 피어스)에게 발탁돼 예술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의 설계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실무자들은 예산 깎을 궁리만 하며, 끊임없이 돈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는 해리슨의 변덕으로 사면초가에 놓인다.
영화는 웅장하고 묵직한 건물이 올라가는 과정과, 붕괴해 가는 라즐로의 내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집요한 자아, 그 분열적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펄리시티 존스)의 깊은 슬픔을 마치 건축물 올리듯이 기초 공사부터 탄탄하게 쌓아올린다. 쇼트폼 시대의 러닝타임으로는 무모하다 싶은 3시간35분의 상영시간이 불가피했을 터.
감독 스스로 영화 중간에 쉬는 시간을 넣은 것은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결과다. 라즐로가 고생하던 미국에서 기회를 잡고 유럽에 있던 아내까지 데려오며 한껏 아메리칸 드림으로 부풀어 오르는 지점에서 영화는 15분간 정지한다. 라즐로가 미국에서 정착하기까지를 그린 전반과 본격적인 건축가로서의 삶을 그린 후반으로 이야기가 나뉘어 설계됐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불편함은 크지 않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비스타비전 필름으로 담아낸 20세기 중반의 미묘한 질감과 거대한 스케일이, 큰 스크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웅장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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