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아내를 제 첩으로 주시오”...궁에서 쫓겨난 왕실 여성들이 간 곳은 [서울지리지]
1457년(세조 3) 단종복위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단종(1441~1457)은 영월로 유배돼 살해되고, 그의 부인 정순왕후 송 씨(1440~1521)는 궁에서 쫓겨나 여승이 됐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송 씨는 흥인문 밖에 초가로 절을 짓고 거처했다. 그녀는 항상 동쪽 봉우리에 올라 남편이 죽은 영월을 향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사람들은 왕후가 기도하던 자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왕은 후궁과 비빈 등 많은 배우자를 거느렸다. 왕의 승하와 왕위 찬탈 또는 선위(禪位) 등으로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선왕의 수많은 여인들은 갈 곳이 없다. 왕후나 왕의 생모 등 극히 일부는 궐 안팎에 별도로 마련된 가옥을 궁으로 삼아 살도록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자의 또는 타의로 평생 불교에 귀의해 선왕의 은덕을 기리거나, 아예 출가해 정식 비구니가 돼 업을 닦아야만 했다.
조선건국 후 처음으로 정업원으로 들어간 여인은 1398년(태조 7년),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의 3녀이자 신덕왕후 강 씨(1356~1396)의 장녀인 경순공주(?~1407)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오빠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에 의해 남편 이제(?~1398)가 이방번(1381~1398), 세자 이방석(1382~1398)과 함께 살해되자 아버지에 의해 승려가 됐다. 세속에 아직 미련이 남아서 였을까. <정종실록> 1399년(정종 1) 9월 10일 기사는 “(경순공주가) 머리를 깎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고려 공민왕의 후비이자 익제 이제현(1287~1367)의 딸 혜빈 이 씨(혜화궁주‧재위 1359~1374)가 공민왕 사후 정업원으로 출가했다가 한양으로 옮긴 정업원에서 1대 주지를 했다. 태종이 혜빈에 이어 2대 주지에 임명한 여성은 소도군(昭悼君) 처 심 씨다. 소도군은 태조의 8남이자 조선의 첫 번째 세자였던 방석을 말한다. 방석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소도군으로 강등된 뒤 무려 282년이 지난 후에야 신원을 회복한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1680년(숙종 6) 7월 27일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로 방번은 무안대군, 방석은 의안대군으로 추증됐다.
성종 재위기에 정업원은 번성했다. <성종실록> 1480년(성종 11) 2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장령 이인석은 “여러 관사의 노비는 수효가 적어서 10여 구 정도인데 정업원은 180여 구에까지 이른다”며 “정업원 노비를 여러 관서로 나누어 소속시켜야 한다”고 아뢨다. 성종은 “선대왕들이 하사한 것인데 지금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고 답했다. 정업원은 궁궐(창덕궁)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소음공해 등 각종 문제가 야기됐다. <성종실록> 1486년(성종 17) 12월 11일 기사는 “정업원은 창덕궁의 담벼락 곁에 있어 범패 소리가 궁궐 내부까지 들리니 진실로 적당한 곳이 아니다”고 했다.
중종 때는 연산군의 후궁 곽 씨(숙의 곽 씨)가 주지였다. 곽 씨는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승려가 됐다. 그녀가 정업원 주지였을 때 승려 각령(覺靈)이 정업원 여승들과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실록> 1522년(중종 17) 3월 3일 기사에 의하면, 사헌원은 “(간통한) 정업원 니승(尼僧·여승) 원일(元一), 종지(宗知), 묘심(妙心)을 체포해 심문해야 하지만 주지를 봐서 함부로 잡아오기 불편하다”고 보고했다. 중종은 여승들을 잡아들여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이 불타며 정업원도 사라졌다. 전쟁후 비구니들은 왕실과 일반인들의 시주를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선조대 문신 차천로(1556~1615)의 <오산집>에 실린 ‘정업원인수궁중창모재권선문’(淨業院仁壽宮重刱募財勸善文)은 “국가와 200년 간 존망을 같이 하였고 앞에서 시작하고 뒤에서 이루니 어찌 수만 명의 제자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임진년에 이르러 오랑캐의 재난이 생겼더란 말인가”라면서 “세상 육해(陸海) 사이에 간직해 둔 보배를 아끼지 말고 오직 사후에 복전(福田·복덕의 근원)에서 받을 이익을 구하기 바란다”고 했다.
자수원, 인수원은 애초 후궁들의 처소인 자수궁과 인수궁으로 지어졌다가 추후 불당으로 변질됐다. <문종실록> 1450년(문종 즉위년) 3월 21일 기사는 “무안대군(방석)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세종대왕)의 후궁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고 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가 잠시 이곳에 살기도 했다. 종로보건소 옆 군인아파트(종로 옥인동) 앞에 자수원 표지석이 있다.
자수원과 인수원은 명종대 문정왕후(1501~1565)의 지원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1878~1967)가 1929년 발간한 <이조불교>에 의하면, 1554년(명종 9) 문정왕후의 의지로 대대적인 자수원 수리가 이뤄져 조선 제일의 비구니사찰이 되었으며 5000여명의 비구니가 거주하면서 수행했다.
안일원(安逸院)도 동일한 목적으로 세운 비구니원이다.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4일 기사는 “정업원, 안일원 등의 옛터는 바로 선왕의 후궁이 거주하던 별처로 궁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지금 여승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는데도 관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도성 안의 무식한 자들이 분주하게 떠받들고 혹 딸들을 다투어 출가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학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비구니원은 폐지와 복구를 되풀이했다. <현종실록> ‘현종행장’은 “1661년(현종 2) 2월 왕이 명을 내려 도성 안의 자수원과 인수원 두 곳을 철거하게 해 나이 젊은 자는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추방하였다”고 했다.
이 조치 후 110년이 지난 뒤 다시 정업원이 실록에 나타난다. <영조실록> 1771년(영조 47) 8월 28일 기사는 “임금이 정업원의 옛터에 누각과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지문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었으며 남쪽으로 동관왕묘와 멀지 않다.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대왕의 왕후 송 씨가 폐위되면서 거주하던 옛터이다”고 했다. 정업원구기비(舊基碑)는 종로 숭인동 청룡사 앞에 자리하고 있다. 청룡사는 순조대 이후 중창된 사찰이다. 정순왕후가 남편을 보기 위해 올랐다는 동망봉은 정업원 동남편 야산이다.
비석을 세우기 앞서 영조의 명으로 사전답사를 한 승지 이정수는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이 없으며 … 깊은 골짜기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옛날에는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보고한다. 영조는 비석이 완성되자 세손 정조와 정업원에 직접 행차해 네 번 절했다. <영조실록> 1771년 9월 6일 기사는 “임금이 먼저 창덕궁 진전(眞殿·어진 사당)에 나아가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어 정업원 유지에 거둥하여 비각을 살피고 비각 앞에서 사배례를 행하였다”고 했다. 영조는 “성후(聖后·정순왕후) 영령께서 오늘 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라고 감회에 젖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환국이 지속되는 혼란한 과정에서 국왕에 대한 충절을 요구하는 의도로 사육신의 추숭사업을 전개했고 노산군과 그의 부인도 단종과 정순왕후로 복위했다. 영조 역시 숙종대부터 이어져 온 단종선양 사업의 연장선상인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재정립하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정업원구기비를 세웠던 것이다.
해주 정 씨(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가문) 분재기(상속문서)에 따르면, 숭인동 정업원 땅은 애초 정순왕후의 스승이자 정업원 주지 이 씨 소유의 재산이었으나 사형 윤 씨를 거쳐 정순왕후에게 상속됐다. 정순왕후의 법명은 혜은(惠誾)이며 말년에 정업원 주지를 했다. 정순왕후는 세조때 도성 내 정업원에서 출가했으며 연산군 때 여러 비구니들과 같이 숭인동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공신들과 음주를 즐겨 술과 관련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신숙주가 술자리에서 세조와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이 동석한 누군가에 의해 외부로 전해지면서 부풀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후세 사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 분위기 속에서 당대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이 컸던 신숙주에 비판이 집중되며 시중에 떠돌던 소문이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살았다. 남편 단종 이후 왕이 무려 5번이나 바뀐 1521년(중종 16) 6월 4일,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참고문헌>
1. 조선시대 왕실의 비구니원 설치와 신행. 역사학보 제178집. 이기운. 역사학회. 2003
2. 조선시대 정업원의 위치에 관한 재검토 : 영조의 정업원구기비 설치를 중심으로. 서울과 역사 제97호. 탁효정. 서울역사편찬원. 2017
3.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 : 새롭게 발견된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제82집. 탁효정. 조선시대사학회. 2017
4. 정업원구기 :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 2020
5. 이조불교.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1878~1967). 동경 보문관. 1929
6. 한국불교사. 김영태. 경서원. 1997
7. 한양의 여성공간 :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름과 장소들. 서울역사박물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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