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아내를 제 첩으로 주시오”...궁에서 쫓겨난 왕실 여성들이 간 곳은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4. 2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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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들, 여승의 삶을 살아가다
비구니가 춤을 추는 승무장면(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
권세가에서 나 금지옥엽 자랐고 나이가 차서는 대궐로 시집가 평생토록 영화를 누릴 줄 알았건만,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될 운명일 줄이야….

1457년(세조 3) 단종복위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단종(1441~1457)은 영월로 유배돼 살해되고, 그의 부인 정순왕후 송 씨(1440~1521)는 궁에서 쫓겨나 여승이 됐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송 씨는 흥인문 밖에 초가로 절을 짓고 거처했다. 그녀는 항상 동쪽 봉우리에 올라 남편이 죽은 영월을 향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사람들은 왕후가 기도하던 자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왕은 후궁과 비빈 등 많은 배우자를 거느렸다. 왕의 승하와 왕위 찬탈 또는 선위(禪位) 등으로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선왕의 수많은 여인들은 갈 곳이 없다. 왕후나 왕의 생모 등 극히 일부는 궐 안팎에 별도로 마련된 가옥을 궁으로 삼아 살도록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자의 또는 타의로 평생 불교에 귀의해 선왕의 은덕을 기리거나, 아예 출가해 정식 비구니가 돼 업을 닦아야만 했다.

대표적 왕실 여인들의 귀의처는 “죄를 씻는다”는 뜻의 정업원, 공주·후궁들 주지 역임
승무(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
승무(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정업원(淨業院)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출가 후궁들의 전통적인 귀의처였다. 정업은 “업보(죄)를 씻는다”는 뜻이다. 고려 정업원은 개경에 있었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으로 이전했다. <세종실록> 1433년(세종 15) 음력(이하 음력) 7월 9일 기사에서 종묘의 풍수를 논하며 “정업원 뒤의 한 작은 봉우리가 일어나서 종묘의 자리를 이루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볼 때 정업원은 창덕궁 후원 서쪽의 서동(西洞·원서동)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건국 후 처음으로 정업원으로 들어간 여인은 1398년(태조 7년),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의 3녀이자 신덕왕후 강 씨(1356~1396)의 장녀인 경순공주(?~1407)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오빠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에 의해 남편 이제(?~1398)가 이방번(1381~1398), 세자 이방석(1382~1398)과 함께 살해되자 아버지에 의해 승려가 됐다. 세속에 아직 미련이 남아서 였을까. <정종실록> 1399년(정종 1) 9월 10일 기사는 “(경순공주가) 머리를 깎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고려 공민왕의 후비이자 익제 이제현(1287~1367)의 딸 혜빈 이 씨(혜화궁주‧재위 1359~1374)가 공민왕 사후 정업원으로 출가했다가 한양으로 옮긴 정업원에서 1대 주지를 했다. 태종이 혜빈에 이어 2대 주지에 임명한 여성은 소도군(昭悼君) 처 심 씨다. 소도군은 태조의 8남이자 조선의 첫 번째 세자였던 방석을 말한다. 방석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소도군으로 강등된 뒤 무려 282년이 지난 후에야 신원을 회복한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1680년(숙종 6) 7월 27일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로 방번은 무안대군, 방석은 의안대군으로 추증됐다.

정업원은 성종때 불교신자 인수대비 지원으로 크게 번창···노비수만 180여명 달해
궁녀들의 부축을 받고 가는 영친왕비(1922년 촬영). [국립고궁박물관]
고종의 후궁 귀인 양씨(1917년 전후 촬영). 덕혜옹주의 생모다. 원래 상궁이었지만 고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됐다. 조선시대 후궁의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는 차림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순종의 첫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국립고궁박물관]
정치적 회오리 속에 오갈데 없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출가가 유일했을지 모른다. 성종 때는 수춘군 이현(1431~1455·세종의 13남)의 부인 정 씨가 정업원 주지를 했다. 남편이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서 정 씨 역시 머리를 깎았다. <성종실록> 1482년(성종 13) 2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조정에서 왕자의 부인이 여승으로도 모자라, 절의 주지가 된 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성종은 “대왕대비께서 명하여 주지로 삼은 것이다. 처음 비구니가 되었을 때에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꾸짖었다.

성종 재위기에 정업원은 번성했다. <성종실록> 1480년(성종 11) 2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장령 이인석은 “여러 관사의 노비는 수효가 적어서 10여 구 정도인데 정업원은 180여 구에까지 이른다”며 “정업원 노비를 여러 관서로 나누어 소속시켜야 한다”고 아뢨다. 성종은 “선대왕들이 하사한 것인데 지금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고 답했다. 정업원은 궁궐(창덕궁)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소음공해 등 각종 문제가 야기됐다. <성종실록> 1486년(성종 17) 12월 11일 기사는 “정업원은 창덕궁의 담벼락 곁에 있어 범패 소리가 궁궐 내부까지 들리니 진실로 적당한 곳이 아니다”고 했다.

중종 때는 연산군의 후궁 곽 씨(숙의 곽 씨)가 주지였다. 곽 씨는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승려가 됐다. 그녀가 정업원 주지였을 때 승려 각령(覺靈)이 정업원 여승들과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실록> 1522년(중종 17) 3월 3일 기사에 의하면, 사헌원은 “(간통한) 정업원 니승(尼僧·여승) 원일(元一), 종지(宗知), 묘심(妙心)을 체포해 심문해야 하지만 주지를 봐서 함부로 잡아오기 불편하다”고 보고했다. 중종은 여승들을 잡아들여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이 불타며 정업원도 사라졌다. 전쟁후 비구니들은 왕실과 일반인들의 시주를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선조대 문신 차천로(1556~1615)의 <오산집>에 실린 ‘정업원인수궁중창모재권선문’(淨業院仁壽宮重刱募財勸善文)은 “국가와 200년 간 존망을 같이 하였고 앞에서 시작하고 뒤에서 이루니 어찌 수만 명의 제자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임진년에 이르러 오랑캐의 재난이 생겼더란 말인가”라면서 “세상 육해(陸海) 사이에 간직해 둔 보배를 아끼지 말고 오직 사후에 복전(福田·복덕의 근원)에서 받을 이익을 구하기 바란다”고 했다.

자수궁과 인수궁은 선왕 후궁 처소였다가 불당으로 변모, 자수궁에서 비구니 5000명 수행
정선 필 수성구지(壽城舊址). 인왕산 자락의 옛 수성궁 터를 그렸다. 왼쪽 건물이 자수궁으로 추정된다. 자수궁은 1661년(현종 2) 철폐됐지만 정선은 그림에 자수궁을 표시해 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업원과 함께 한양도성 안팎에는 다양한 비구니사찰이 존재했다. 김영태의 <한국불교사>에 의하면, “1475년(성종 6) 금승(禁僧)의 법을 시행하여 도성 내외의 니사(尼寺·비구니절) 23곳을 허물어 버렸다”는 서술로 미뤄 한양에는 비구니사찰이 허다했다.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비구니사찰은 정업원 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안일원(安逸院)이 있다.

자수원, 인수원은 애초 후궁들의 처소인 자수궁과 인수궁으로 지어졌다가 추후 불당으로 변질됐다. <문종실록> 1450년(문종 즉위년) 3월 21일 기사는 “무안대군(방석)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세종대왕)의 후궁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고 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가 잠시 이곳에 살기도 했다. 종로보건소 옆 군인아파트(종로 옥인동) 앞에 자수원 표지석이 있다.

자수원과 인수원은 명종대 문정왕후(1501~1565)의 지원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1878~1967)가 1929년 발간한 <이조불교>에 의하면, 1554년(명종 9) 문정왕후의 의지로 대대적인 자수원 수리가 이뤄져 조선 제일의 비구니사찰이 되었으며 5000여명의 비구니가 거주하면서 수행했다.

유학자들 반대로 비구니사찰 폐사와 복원 반복···인수원·안일원은 정확한 위치 몰라
인수궁 역시 명종의 즉위와 동시에 수리를 추진했지만 유신들의 반대 등으로 공사가 늦어졌다. 그러자 공사를 맡은 관리들이 태만하자 문초했다. <명종실록> 1546년(명종 1) 7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인수궁은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지난 3월부터 수리하도록 하였다. 엊그제 내관을 보내 살펴보았지만 공사감독과 관아의 서리들이 나타나지 아니하여 일의 진척이 없으니 죄를 물어라. 지금 수리가 끝나지 못하여 후궁들이 이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아직도 사저에 있다”고 질책했다. 인수궁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안일원(安逸院)도 동일한 목적으로 세운 비구니원이다.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4일 기사는 “정업원, 안일원 등의 옛터는 바로 선왕의 후궁이 거주하던 별처로 궁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지금 여승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는데도 관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도성 안의 무식한 자들이 분주하게 떠받들고 혹 딸들을 다투어 출가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학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비구니원은 폐지와 복구를 되풀이했다. <현종실록> ‘현종행장’은 “1661년(현종 2) 2월 왕이 명을 내려 도성 안의 자수원과 인수원 두 곳을 철거하게 해 나이 젊은 자는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추방하였다”고 했다.

이 조치 후 110년이 지난 뒤 다시 정업원이 실록에 나타난다. <영조실록> 1771년(영조 47) 8월 28일 기사는 “임금이 정업원의 옛터에 누각과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지문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었으며 남쪽으로 동관왕묘와 멀지 않다.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대왕의 왕후 송 씨가 폐위되면서 거주하던 옛터이다”고 했다. 정업원구기비(舊基碑)는 종로 숭인동 청룡사 앞에 자리하고 있다. 청룡사는 순조대 이후 중창된 사찰이다. 정순왕후가 남편을 보기 위해 올랐다는 동망봉은 정업원 동남편 야산이다.

영조, 단종선양 하며 정순왕후 살던 동대문 밖에 비석 세우고 직접 거둥해 참배
영조가 동대문 밖 정업원 터에 세운 ‘정업원구기비’ 비석각. 종로 숭인동 청룡사 앞에 있다. [배한철 기자]
창덕궁 옆 정업원은 연산군 때 비구니들이 도성 밖으로 쫓겨난 이후로 일시적으로 폐사된다. 이 시기 비구니들이 동대문 밖 인창방(숭인동)에 몰래 다시 절을 짓고 승가를 유지해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실록 등 각종 기록은 정순왕후가 도성 밖에 정업원을 지었다고 적고 있는데 정업원은 인창방의 절을 말하는 것이다.

비석을 세우기 앞서 영조의 명으로 사전답사를 한 승지 이정수는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이 없으며 … 깊은 골짜기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옛날에는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보고한다. 영조는 비석이 완성되자 세손 정조와 정업원에 직접 행차해 네 번 절했다. <영조실록> 1771년 9월 6일 기사는 “임금이 먼저 창덕궁 진전(眞殿·어진 사당)에 나아가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어 정업원 유지에 거둥하여 비각을 살피고 비각 앞에서 사배례를 행하였다”고 했다. 영조는 “성후(聖后·정순왕후) 영령께서 오늘 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라고 감회에 젖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환국이 지속되는 혼란한 과정에서 국왕에 대한 충절을 요구하는 의도로 사육신의 추숭사업을 전개했고 노산군과 그의 부인도 단종과 정순왕후로 복위했다. 영조 역시 숙종대부터 이어져 온 단종선양 사업의 연장선상인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재정립하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정업원구기비를 세웠던 것이다.

해주 정 씨(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가문) 분재기(상속문서)에 따르면, 숭인동 정업원 땅은 애초 정순왕후의 스승이자 정업원 주지 이 씨 소유의 재산이었으나 사형 윤 씨를 거쳐 정순왕후에게 상속됐다. 정순왕후의 법명은 혜은(惠誾)이며 말년에 정업원 주지를 했다. 정순왕후는 세조때 도성 내 정업원에서 출가했으며 연산군 때 여러 비구니들과 같이 숭인동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 “정순왕후 첩으로 달라”요구?···후대 신숙주 비판여론 속 과장된 소문 문헌에 수록
청룡사 대웅전. 청룡사는 순조 이후 정순왕후의 정업원 터에 새로 지어졌다. [배한철기자]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간 단종을 바라보던 동망봉. 동망봉은 청룡사에서 500m가량 떨어져있다. [배한철기자]
동망봉에서 바라본 동쪽 전경. [배한철기자]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이 정순왕후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고 알려진 청계천 영도교. [배한철기자]
기구한 운명의 정순왕후를 ‘세조의 위징’으로 불렸던 신숙주가 첩으로 달라고 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다수 전한다. 조선중기 문신 윤근수(1537~1616)가 쓴 <월정만필>은 “노산왕(단종)의 비 송 씨는 적몰(籍沒·몰수)되어 관비가 되었다. 신숙주가 공신의 여종으로 받아내고자 하여 세조에게 청하였으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안정복(1712~1791)의 <순암집>,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 김택영(1850~1927)의 <한사경> 등 다수의 저작에서 이 이야기를 다룬다. 신숙주가 한때 주군의 부인이자 또한 왕후였던 송 씨를 탐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이다.

세조는 공신들과 음주를 즐겨 술과 관련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신숙주가 술자리에서 세조와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이 동석한 누군가에 의해 외부로 전해지면서 부풀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후세 사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 분위기 속에서 당대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이 컸던 신숙주에 비판이 집중되며 시중에 떠돌던 소문이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살았다. 남편 단종 이후 왕이 무려 5번이나 바뀐 1521년(중종 16) 6월 4일,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참고문헌>

1. 조선시대 왕실의 비구니원 설치와 신행. 역사학보 제178집. 이기운. 역사학회. 2003

2. 조선시대 정업원의 위치에 관한 재검토 : 영조의 정업원구기비 설치를 중심으로. 서울과 역사 제97호. 탁효정. 서울역사편찬원. 2017

3.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 : 새롭게 발견된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제82집. 탁효정. 조선시대사학회. 2017

4. 정업원구기 :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 2020

5. 이조불교. 다카하시 토오루(高橋 亨·1878~1967). 동경 보문관. 1929

6. 한국불교사. 김영태. 경서원. 1997

7. 한양의 여성공간 :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름과 장소들. 서울역사박물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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