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타는 고통, 몰래 먹이기 어렵다”…30년형 ‘니코틴 살인’ 무죄 반전

권상은 기자 2024. 2. 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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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기환송심 “범죄 증명 안돼” 아내에 무죄
니코틴 용액./뉴스1

남편에게 니코틴 원액이 섞인 음식물을 먹여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았던 30대 여성이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에 대한 부검에서 니코틴 성분이 검출되면서 타살로 지목됐고, ‘화성 니코틴 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수원고법 형사1부(박선준 정현식 강영재 고법판사)는 2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의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남편 사망 후 그의 계좌에 접속해 300만원의 대출을 받은 혐의(컴퓨터 등 이용 사기)에 대해서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범행 준비와 실행 과정, 그러한 수법을 선택한 것이 합리적인지, 발각 위험성과 피해자의 음용 가능성, 피해자의 자살 등 다른 행위가 개입될 여지 등에 비추어 봤을 때 합리적 의문의 여지가 있다”며 “범죄증명이 안 된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 말초 혈액에서 검출된 니코틴 농도에 비추어 볼 때 흰죽과 찬물을 이용했다면 고농도 니코틴 원액이 필요해 보인다”며 “수사기관은 피고인에게 압수한 니코틴 제품의 함량 실험을 하지 않았고, 압수된 제품이 범행에 사용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니코틴을 음용할 경우 혓바닥을 찌르거나 혓바닥이 타는 통증이 느껴져 이를 몰래 음용하게 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공통된 전문가 의견”이라며 “의식이 뚜렷한 피해자에게 니코틴이 많이 든 물을 발각되지 않고 마시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피해자의 자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오랜 기간 내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을 시도한 적 있고, 가정의 경제적 문제, 사망 무렵 부친과의 불화 후 ‘부모 의절’을 검색하는 등 여러 문제로 피해자의 불안정 정서가 심화했을 가능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A씨는 2021년 5월 26∼27일 남편에게 3차례에 걸쳐 치사량 이상의 니코틴 원액이 든 미숫가루, 흰죽, 찬물을 먹도록 해 남편이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검찰의 기소 내용에 따르면 당시 A씨의 남편은 미숫가루와 흰죽을 먹은 뒤 속쓰림과 흉통 등을 호소하며 밤에 병원 응급실을 다녀왔으며, 다시 A씨가 건네준 찬물을 마신 뒤 숨졌다. 부검에서 사인은 급성 니코틴 중독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채무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A씨가 남편이 사망하면 보험금은 물론 남편의 부동산·예금 등을 상속받고 내연 관계이던 남자와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살해를 마음먹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피해자가 흰죽을 먹은 뒤 보인 오심, 가슴 통증 등은 전형적인 니코틴 중독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며 “피고인은 액상 니코틴을 구매하면서 원액을 추가해달라고 했고, 이를 과다 복용할 경우 생명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등 피해자 사망 전후 사정을 볼 때 3자에 의한 살해 가능성은 작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2심은 찬물을 통한 범죄만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형량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7월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유죄 부분에 대해 제시된 간접증거들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적극적 증거로서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유죄로 확신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의문점들이 남아 있고 이에 대한 추가 심리가 가능하다고 보여 원심의 결론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피해자에게 찬물을 준 후 밝혀지지 않은 다른 경위로 니코틴을 음용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고, 수사기관은 피고인의 사전 범행 준비·계획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며 “압수된 니코틴 제품이 피해자를 살해한 범행에 사용된 제품이라거나, 그 존재가 피고인의 범행 준비 정황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파기환송심에서는 변호인이 제출한 니코틴 용액(희석액)을 재판장과 수사 검사가 향을 맡아보고 시음하기도 했다. 변호인측은 니코틴 용액의 냄새와 맛 때문에 피해자 몰래 음식에 타는 방법으로 살해할 수 없다며 피해자의 자살 가능성을 집중 부각했다. 검찰은 파기환송심에서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이날 선고 직후 A씨의 법률대리인 배재철 변호사는 취재진을 만나 “처음부터 피고인을 범인으로 잘못 지정해 수사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며 “오늘 재판부에서 판결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듯이 모든 범죄 사실 중 가장 흉포한 게 살인인데, 피고인은 뚜렷한 동기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열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원리에 의해 재판부가 무죄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파기환송심 판결에 대해 검찰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상고 여부는 판결문을 보고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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