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ㅏㄴㄱㅡㄹ’ 에서 ‘한글’로 완성되기까지[북리뷰]
김태호 지음│역사비평사
광복후 한글타자기 개발 본격화
초·중·종성 나뉜 ‘세벌식’ 발명
軍서 활용되며 황금기 맞았으나
정부 표준화로 ‘다양성’ 사라져
“앞세대의 헌신·노고 돌아보길”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할 때 자판 ‘ㄱ’을 누르는데 ‘ㅐ’가 나오고, ‘ㅇ’을 치는데 ‘ㅣ’가 입력돼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판 설정이 ‘세벌식’으로 바뀌어 벌어지는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판의 배열이 자음과 모음, 두 벌로 나뉘어 있는 ‘두벌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초성과 중성, 종성으로 나뉘어 있는 세벌식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세벌식으로 타자하는 한 유튜브 영상이 조회수 90만을 넘기며 세벌식이 새롭게 주목받기도 했다. 한글 타자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벌식과 세벌식뿐만 아니라 오벌식, 네벌식 등 여러 방식이 있었다.
한글 타자의 방식이 지금과 같이 자리 잡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20년 이상 한글 타자기에 관한 자료를 모으며 연구해온 김태호 전북대 교수가 쓴 ‘한글과 타자기’는 한글 타자기가 발명되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글 타자기의 역사를 다룬다.
현대 타자기의 원형이 확립된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미국에서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3국은 이를 각 국가의 언어에 맞게 들여왔는데 중국과 일본은 한자를 써야 하는 언어의 특성상, 거대한 글쇠 묶음 속에서 완성된 글자를 찾아서 찍어내는 옥편식 타자기로 방향을 튼 반면, 우리는 로마자 타자기의 기본 형태를 유지하며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알파벳들이 일렬로 이어지며 단어가 되고 문장을 만드는 것과 달리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모여 하나의 음절글자를 만드는 ‘모아쓰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소를 한자리에 모아 글자를 만들기 위해선 글쇠 중 일부를, 롤러를 움직이지 않는 ‘안움직글쇠’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 발명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으나 수요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글 타자기의 보편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광복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한글을 쓰는 것 자체가 위험한 정치적 행위였던 시기가 끝나고, ‘조선발명장려회’는 1949년 한글 타자기를 현상 공모했다. 대상은 없었고 세 명이 2등상, 두 명이 3등상을 받았는데 세 명의 2등 입상자 중 한 명이 바로 ‘공안과’의 설립자이자 한글 타자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공병우(1907∼1995)다. 한글학자 이극로와의 만남 이후 한글 운동을 시작한 공병우는 일본어로 냈던 자신의 책을 한글로 옮기겠다고 마음먹은 후 마땅한 한글 타자기가 없자 직접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나온 게 1948년 특허를 출원한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다.
한글 타자기 시장은 1950∼1960년대 급속도로 커졌다. 1968년 각 정부부처가 이용하는 한글 타자기 수가 1만 대를 넘어설 정도였으며 제조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누계 6만2000여 대의 타자기가 팔려 나갔다.
흥미롭게도 이때 타자기 시장의 팽창을 이끈 곳은 군이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1909∼1980)이 공병우 타자기를 군에 도입한 것이다. 여기에 5·16 군사정변 이후 군대식 문화가 사회 각 분야를 지배하면서, 한글 타자기는 다른 분야로도 퍼져 나갔다. 시장이 커지자 김동훈, 백성죽 등 다른 발명가들도 각자의 타자기를 선보였다.
1960년 시판 타자기가 13종에 이르자 이들 사이에 호환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로 부각됐고 이는 자판 표준화를 위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윽고 1969년, 국무총리 훈령으로 표준 자판이 공포됐다. 국가가 제정한 첫 번째 한글 표준 자판으로, 네벌식이었다.
특이한 점은 미국 등의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는 정부가 자판 표준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은 기존 사업자들이 채택한 다양한 자판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시장에 강제했다. 이 과정에서 공병우, 김동훈 등 기존 사업자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에 저항한 공병우와 그를 향한 탄압은 “더 빠르고 효율적이었으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밀려난 세벌식 타자기 이야기”로 회자된다.
이어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된 1983년 정부는 전산기기와의 통일성을 염두에 둔 새로운 표준 자판을 내놓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두벌식 자판이다. 오늘날 두벌식 표준 자판을 쓰고 있는 우리 중 절대다수는 세벌식이나 네벌식 자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군에서 사용되기 시작하며 황금기를 맞았으나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잊힌 세벌식 타자기의 역사도 모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표준화 이전의 한글 타자기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책의 목표”라며 “오늘날 거의 잊히고 만 한글 기계화를 향한 앞세대의 헌신과 노고를 함께 돌아볼 것”을 권한다. 320쪽, 1만85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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