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9] 혁신의 아이디 ‘광주’, 패스워드 ‘5·18′
자신들의 시대에는 해독의 어떤 약속이나 지침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제각기 녹이 슬어 삐걱대기만 할 뿐 열리지 않는 자물쇠가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패스워드가 있어서 집단에 편입될 수 있으며, 희생양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결속된 구성원들 간의 은밀한 희열과 더불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제물이 마련된다. 피스톤이 있어서 단두대와 분묘에 불과한 사회의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중에서
‘희생, 통합, 변화,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여당 혁신위원장의 첫 공식 외부 일정은 광주 5·18 묘지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광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있다는 글을 남겼고 ‘피해자 후손들’까지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전문 수록, 국가 유공자 제정에 힘쓰겠다는 약속도 했다. 국립현충원 방문은 그의 두 번째 공식 일정이었다.
2016년, 광주 시민에게 호남 홀대론을 변명하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18 헌화 분향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2020년엔 보수당 최초라며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의원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 이준석 전 당대표, 나경원 당대표 후보,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 등은 비석을 쓰다듬거나 눈물을 떨구었다.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까 싶을 만큼 인간과 세상과 역사를 천착한 문장들이 퍼즐처럼 그림을 완성하는 ‘떠도는 그림자들’에는 죽은 아내가 오래전 죽은 남자를 마음 깊이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고통받는 늙은 어부가 등장한다. 아내의 유령이 냉정히 말한다. “당신 품에 안겨 행복했을 때조차 죽은 그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 내겐 더 큰 기쁨이었어요.”
혁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당은 남편 곁에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살다 죽은 어부의 아내를 닮았다. 표를 주고 실망하면서도 다시 기대하기를 반복하는 국민에게 야당의 이념과 지지층이 먼저라며 매번 더 큰 희생과 더 긴 인내와 더 넓은 포용을 요구한다. 그 결과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질 ‘새로운 미래’에 가입하는 공식 아이디는 ‘광주’ ‘결속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입력해야 하는 패스워드는 ‘5·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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