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판결문' 고민하던 판사가 넣은 그림 한 장

손가영 2023. 1. 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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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장애인 원고 요청에 따라 작성... "당연한 권리, 시스템 구축해야"

[손가영 기자]

 지난 2일 서울행정법원 11부가 작성한 '이지리드' 방식이 적용된 판결문 3쪽 일부 갈무리.
ⓒ 손가영
 
74년 한국 사법 역사상 처음 나온 '쉬운 판결문'이 화제다.

의미있는 시도라는 긍정적 평가가 많지만 사법부가 그동안 장애인을 비롯해 일반 시민들의 판결문 읽을 권리를 보호하지 못한 현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 법원이 모든 시민들의 '쉽게 판결문 읽을 권리' 보장을 위해 제도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된다. 

지난 12월 2일 서울행정법원 11부(강우찬 부장판사)는 청각장애인(원고)이 서울 강동구청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인 일자리 사업 불합격 취소 소송 1심 선고를 했다. 원고는 중증 청각장애인들이 충분한 면접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채용절차에서 차별을 받았다며 강동구청의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평등원칙을 위반한 절차상 위법이 있다고 인정하긴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그러면서 화제가 된 '쉬운 판결문'을 내놨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통상 판결문에선 쓰지 않는 문구가 판결문 첫 줄에 나온다. '청구를 기각한다'라는 문장 끝에 '원고가 졌다'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이어 판결문 2쪽부터 5쪽까지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이라는 짧은 요약문을 실었다. 이 요약문은 '재판부는 이런 점을 유심히 살폈다'거나 '고민했다'는 표현을 넣어 재판 쟁점을 짚어주는 등 일상적인 대화법으로 작성됐다. 문장 구조와 단어도 다른 판결문보다 쉬웠다. 

참고 그림도 첨부됐다. 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이 똑같은 높이의 발판 위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그림(기회의 평등)과 키가 작을수록 더 높은 발판 위에 서서 관람하는 그림(결과의 평등)을 나란히 배치한 그림으로, 재판의 쟁점인 평등 원칙을 설명하는 자료였다. 재판부는 '모두가 똑같은 높이 발판에 서있다면 평등원칙에 위배되기에 이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이지리드(Easy-Read)'를 시도한 '쉬운 판결문'이다. 이지리드는 '쉬운 언어'(Plain language)라고도 통용된다. 청각·발달·정신장애인 등 비장애인에 비해 문해력이 약한 이들을 위해 일상적인 단어, 직관적인 표현, 짧고 간단한 문장으로 정보를 알리는 방법이다. 필수적이지 않은 수식어나 부정문 사용을 지양하고 동사 위주로 문장을 쓰기에 일반적인 공공 문서와 표현 방식이 크게 다르다.

재판부가 쉬운 언어를 적용한 까닭은 원고의 요청이 있어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께서는 2022년 10월 22일자 탄원서를 통해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신 바 있고 이는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며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지 리드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 이유를 작성하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장애인 당사자 사건을 대리해왔던 조미연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이번 판결문에 대해 "장애 유형과 정도란 건 장애인마다 모두 다르기에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 중심으로 상황과 의사를 확인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이번 사례는 재판부가 청각장애인의 의사를 확인한 점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첫 시도 긍정적이지만... " 아직 갈길 멀다
 
 한국장애인연맹과 열린네트워크 서울지부, 자립생활지원센터 with, 에이블 업, 원심회 회원들이 2019년 11월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청각자애인의 알 권리 확대를 위해 청와대, 국회 등 기자회견에 수어 통역사 배치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장애계에선 의미있는 첫 시도임엔 틀림없으나, 여전히 판결문의 표현이 어려워 더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신건강권리옹호센터장은 12월 23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청각장애라면 단지 귀의 기능만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어라는 독특한 언어체계는 비장애인의 언어체계와 매우 다르다"며 "수어엔 조사가 없는 등 문법, 문장 구조, 어휘에 대한 이해도 다를 수밖에 없어 문해력이 비장애인과 큰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재판부에 서운한 말이겠지만 발달장애 전문가들에게 확인을 받아 본 결과, 아직 당사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라며 "판결문의 '엄밀성', '감안' 등과 같은 어려운 단어와 표현도 여전히 많은데 국제기준에 맞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쉽게 써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발달장애인의 알 권리를 위해 각종 문서들을 쉬운 언어로 번역하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의 백정연 대표도 "한 문장이 3~5줄을 차지하는 등 길이가 길고 '주의를 환기한다', '위법하다고 볼 여지가 크다'라는 표현도 이해가 어렵다"라며 "참고 그림도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고 상징적인 면이 강해 이지리드에 적합한 그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미·유럽 법조계의 '쉬운 판결문', 이렇게 쓴다
 
 영국 항소법원이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재판 당사자에게 제공하는 '이지리드' 항소장 갈무리.
ⓒ 영국 항소법원 자료 갈무리
 
'쉬운 언어' 관련 논의가 먼저 이뤄진 북미·유럽 법조계에서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쉬운 판결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대법원은 2021년 11월 발달장애인이 당사자인 사건에서 1심부터 3심까지의 재판 쟁점과 과정을 쉬운 언어로 정리해 공개했다. 7쪽 요약문엔 15개 이상 영단어로 구성된 문장이 드물었고,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으로 구성됐다. 각 심급 판결의 내용은 7개 문장을 넘기지 않았다.

영국고등법원은 또 지난해 2월 2세 및 4세 아동에 대한 보호 및 입양 허가 명령을 내리는 판결에서도 "(양육권이 박탈된) 두 자녀 어머니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며 쉬운 언어로 판결문을 적었다. 2015년 2월 캐나다에선 온타리오주 법원 나카츠루(S.Nakatsuru) 판사의 쉬운 판결문이 캐나다 법조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판사는 8학년까지만 마친 29세 원주민 청년의 절도 사건 판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판사들이 판결을 함에 있어 쉬운 언어로 말을 하는 건 중요한데 판사들은 이걸 잘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최악의 죄인 중 한 명으로 묘사하고 싶다. (중략)이 나라에 처음 살았던 이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공유하는 (원주민) 피고인들에겐 재판을 받을 권리 뿐 아니라 (재판 과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권리도 있다."

판결 이해할 권리 보장, 남은 과제들

법조계·장애계에서는 사법부가 보다 철저하게 국민들의 '판결문 읽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먼저 문해력이 약한 이들이 판결문을 이해할 권리인 사법 정보 접근권의 강화다. 또 판결은 사법 절차의 한 단계일 뿐이므로, 재판 과정을 포함해 전체 사법 절차에서 장애인 접근권을 강화하는 한편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으로, 법원에서 전체 공공기관으로 제도 취지를 확장해나갈 필요성도 지적된다.

김강원 센터장은 "청각장애인·발달장애인·정신장애인 등이 소송의 결과인 판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건 이들이 국민이 아닌 듯 국가의 사법 서비스로부터 완전히 배제돼왔다는 뜻"이라며 "미국 법원에는 장애인 사법 지원을 전담하는 코디네이터가 법률상 일자리로 확립돼 개별 수요를 다 확인한다. 이런 예처럼 장애인에 대한 사법 지원 전반의 내실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2년 전 국내에서 화제가 됐던 '존댓말 판결문'을 예로 들면서 "존댓말 판결문이 나온 후 존대어가 인권위 결정문과 공공기관 계약서·공문으로도 확대됐듯이, '쉬운 판결문'도 법원의 판결문과 모든 공문서로도 확대되고 다른 공공기관으로 더 퍼져 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미연 변호사도 "앞으로 법원이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미리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알려주는 사법절차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백정연 대표는 "(우리 업체는) 발달장애인들에게 글과 문장이 쉬운지, 의미가 정확히 이해되는지 등을 직접 검수받는다. 법원도 장애 당사자, 전문가들과 이런 검토·협업 체계를 확립해놓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인권위 결정문부터 지방선거 정책 자료집, 근로계약서 등을 쉬운 언어로 다시 쓰는 작업을 해봤다. 판결문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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