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 섬뜩한 살인마 ‘이면’…‘여친 부모 술잔’ 고개 돌리며 마신 이기영
10년 전 하사 시절부터 비슷한 패턴 범죄 반복
(경기=뉴스1) 이상휼 박대준 양희문 기자 = "기사님, 합의금이랑 수리비 많이 줄게요. 대신 경찰에 신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제 집으로 가면 현금 다발이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2022년 12월10일 오후 11시께 경기 고양시의 도로 위에서 이기영(31)이 몰던 SUV와 택시기사 A씨(60대 남성)가 몰던 택시가 접촉사고를 냈다.
이기영이 몰던 차가 우회전할 때 직진하던 택시가 좌측을 들이받았다. CCTV에 잡힌 교통사고 당시 장면으로 볼 때, 이기영보다는 택시기사의 과실이 더 커 보였다.
하지만 이기영은 오히려 '돈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이다. 택시기사는 이기영의 제안에 응해 주소를 건네 받고 파주시 운정동의 아파트로 갔다.
이기영은 집 안으로 A씨를 끌어들인 후 갑자기 돌변해 둔기로 A씨를 잔혹하게 공격해 살해했다. 숨진 A씨의 사체는 옷장 속에 숨겼다. 이기영은 A씨의 택시 내부 소지품을 뒤져 수첩 속에서 A씨의 스마트폰 패턴을 본 뒤 잠금해제했다. 그리고 A씨 명의로 5000만원 넘는 신용대출을 일으켰다.
A씨의 가족과 지인의 연락이 오면 전화는 받지 않고 '메시지'로 응대하면서 A씨인 척 행세했다. A씨 소유 카드로 명품가방과 600만원대 커플링을 사서 여자친구 등에게 선물했다.
그러는 한편 유흥업소에 가서 돈을 펑펑 썼고 시내 술집에서 처음 본 남성들에게 접근해 술과 고기를 사주기도 했다.
◇ 침묵의 목격자 '반려동물' 끼니 챙기려던 여자친구가 시신 발견
끔찍한 살인이 두 건이나 발생한 파주 집에는 개 1마리 고양이 3마리 등 4마리의 반려동물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동물들은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알릴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반려동물의 존재 자체가 '살인마' 이기영의 범죄 행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닷새 뒤인 25일 이 집을 방문한 이기영의 여자친구(30대)가 반려동물들의 끼니를 챙기기 위해 옷장을 뒤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엉망으로 훼손된 A씨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여자친구는 즉시 112에 신고했다.
그에 앞서 같은 날 새벽 A씨의 가족도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 말투도 낯선 점을 이상히 여겨 경찰에 실종신고했다.
한편 이기영은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성탄절로 넘어가는 밤에 고양시내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A씨의 신용카드로 돈을 써대고 있었다. 이기영은 처음 본 남성 5명에게 접근해 '술과 고기를 쏘겠다'면서 합석했다. 술자리에서 그는 "편하게 기영이형이라 부르고 내 번호 저장해"라며 거리를 급속히 좁혔고, 술에 취하자 '나는 건물을 여러 개 갖고 있다. 너희들 내가 돈 주면 사람 죽일 수 있냐'라는 등의 말을 던졌다.
이기영은 A씨의 신용카드로 식대를 지불한 뒤 밖으로 나오자마자 돌연 남성들에게 주먹질을 해대면서 시비를 걸어댔다. 이기영은 상대에게 밀려 쓰러졌다가도 일어나 덤벼댔고, 청년들은 그를 무시하고 자리를 회피했다.
이 시비를 벌인 뒤 이기영은 손을 치료하러 병원에 들렀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 넉 달 전 집주인 살해 뒤 카드빚 내고 피해자 행세
검거된 이기영은 '택시기사와 말다툼하다가 우발적으로 폭행했는데 숨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음주운전 과실이 있을지라도 경미한 접촉사고를 덮겠다고 둔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비상식적인 범행동기였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쳐서 숨지게 했을 경우 119나 112에 신고해 자수하는 사례가 더 많다. 하지만 이기영은 살인 후 곧장 피해자 명의의 신용대출을 벌였으며, 시신을 옷장에 넣어둔 채로 여자친구를 집에 끌어들였다.
이기영의 집 명의를 확인한 결과 소유주는 50대 여성 B씨였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B씨의 휴대전화를 갖고 사용한 사람은 이기영이었다. 이기영은 B씨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B씨의 지인들은 B씨가 바빠서 연락이 안 되고 메시지로만 소통되는 줄로 속았던 것이다.
이기영은 지난 8월 B씨를 이 집에서 둔기로 살해했으며 시신을 인근 공릉천변에 버렸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 동안 이기영은 B씨의 신용카드로 거액의 대출을 일으켜 돈을 펑펑 쓰고 다닌 것으로 파악됐다.
◇ 음주운전 ‘누범기간’ 중 살인…이기영, 軍법원서도 징역 1년6월
제보자 등에 따르면 파주시 출신인 이기영은 20대 초반에 부사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이기영은 2013년 접경지역 육군 모 부대에 근무할 당시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당시 이기영은 경찰이 손을 물어뜯고 도주를 시도했다가 검거됐다.
이기영은 음주운전 및 도로교통법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군검찰로 넘겨져 보통군사법원에 기소됐고 같은해 10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이기영은 '일용직' 또는 '무직' 등으로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음주운전 등을 저질러 집행유예를 받은 이기영은 2019년 11월에도 같은 혐의로 적발돼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누범기간은 출소 이후 3년인데 이때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가중 처벌을 받는다.
이 탓에 이기영은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A씨에게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충분한 합의금을 주겠다”며 집으로 불러들여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 불특정 피해자 명의로 신용대출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사전에 있었는지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이기영이 범한 2건의 살인방식과 신용대출 방식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 짐승처럼 순간의 욕구에 골몰했던 이기영
지금까지 드러난 바를 종합하면 이기영은 순간적 욕구와 분노, 위기 순간에 대한 모면과 회피로 점철됐다. 같은 잘못(음주운전과 도피·상대방 폭행)를 10년 동안 반복했다. 살인을 하고도 술을 마시러 거리를 누볐다.
술을 마시면 차를 몰았고, 경찰에 적발되면 달아났으며, 사고가 발생하면 무마를 시도했고, 돌연 공격해 살해했다. 그리고는 피해자 명의를 이용해 돈을 대출받아 유흥과 여자친구의 환심사기에 골몰했다.
자신이 벌인 짓의 중대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행각이었다.
살인을 하던 날에는 여자친구의 부모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예의를 차리겠다는 듯이 술잔을 받아 고개를 돌리고 마시는 모습도 보였다.
이웃들은 이기영을 '개를 자주 산책시키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라고 기억했다는 점이 특히 섬뜩하다.
daidaloz@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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