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하나 만들기, 30억 든다
#1997년 11월 28일 SBS ‘충전 100%쇼’. 세 소녀가 무대 위에 올랐다. 하얀색 재킷과 티셔츠, 펑퍼짐한 화이트 팬츠를 똑같이 맞춰 입고 ‘아임 유어 걸’을 열창했다. SM 첫 걸그룹이자 K팝 1호 걸그룹 S.E.S.는 이렇게 첫선을 보였다.
#2022년 8월 7일 SBS ‘인기가요’ 뉴진스의 ‘쿠키’ 무대. 이들이 갖춰 입은 교복 스타일 의상은 겉으론 수수해 보여도 대부분 명품이었다. 멤버 민지의 발렌시아가 재킷은 330만원, 하니의 프라다 티셔츠는 160만원짜리다. 해린은 53만원짜리 롬바웃 운동화를 신고 무대를 누볐다.
지난 25년간 K팝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걸그룹의 비중과 의미 자체가 확연히 달라졌다. 내수용 제작에 국한돼 있던 판도는 3세대 걸그룹부터 변했다. K팝 걸그룹 최초 누적 밀리언셀러(앨범 100만 장 이상 판매)를 이룬 트와이스와 전 세계 아티스트 중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11월 1일 기준 8270만 명)를 보유한 블랙핑크의 등장이 걸그룹 시장에서 손익을 다시 따져보는 계기가 된다.
신인 데뷔와 초기 활동 예산도 2015년 10억원 수준에서 현재 2~3배 뛰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걸그룹 스테이씨의 프로듀서 라도는 지난해 유튜브 방송에서 “힘 좀 주고 만들면 최소 20억원은 든다”고 말했다. 보이그룹 아스트로와 걸그룹 위키미키의 소속사 판타지오는 지난해 신인 걸그룹 육성비로 약 31억8000만원을 투자하겠다고 공시했다. 2020년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 에스파는 멤버 4명에 각각 디지털 아바타 제작, 영화 화질 수준의 뮤직비디오와 멤버별 티저 등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최소 50억원’ 이상 투자된 프로젝트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제작자들도 여성에게 롤 모델이 될 만한 그룹 모델링에 초점을 두고 콘셉트나 소구 전략을 짜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작 스케일은 글로벌로 넓어졌다. 올해 데뷔한 걸그룹 15팀 중 절반 이상인 8팀이 외국인 멤버를 적어도 1명 이상 보유하고 있다. 사치로 여겨지던 글로벌 오디션도 필수가 됐다. 기획사가 오디션을 열면 지원이 쇄도하고 이를 팬덤이 주목하는 효과도 증폭된다. 마케팅에선 여성 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고급화’ 전략이 중요해졌다. 데뷔 1년이 채 안 된 걸그룹 아이브가 이탈리아 명품 미우미우의 컬렉션을 입고 뮤직비디오를 찍고, 뉴진스가 비비안웨스트우드 골프 의류를 무대의상으로 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블랙핑크 멤버들이 샤넬, 디올, 셀린느, 생로랑 등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팬들의 지갑을 직접 공략하는 굿즈 제작도 여덕의 취향이 우선 고려된다.
걸그룹 콘셉트 다변화도 최근 제작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3~4세대 걸그룹이 찾아낸 해결책은 ‘반전 걸크러시’다. 무대 위에선 선망과 동경을 자아내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옆집 언니나 동생 같은 친근한 매력을 풍겨야 여덕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극도의 남성향 콘셉트에서 벗어나 다양한 콘셉트를 앞세운 걸그룹들이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면서 다채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비주의 전략은 사라졌다. 금기와 같았던 음주도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있지 채령은 유튜브에서 술에 취한 채 주식 실패담을 스스럼없이 꺼내고, 우주소녀는 멤버들의 주량과 술버릇을 서로 폭로해 ‘우주(酒)소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무대 위에선 강렬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만, 무대 아래에선 친구나 언니, 누나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영선·배정원·황지영·박건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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