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軍에 몰린 ‘묻지 마 예산’… 對美 전쟁 방아쇠 되다[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2022. 11.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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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요즘 ‘전쟁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세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구가했다. 이제 인류의 이성으로 전쟁 발발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냉전 시대가 더 안전하지 않았나 하는 견해마저 생겨나고 있다. ‘cold war(차가운 전쟁)’가 아니라 ‘cold peace(차가운 평화)’의 시대였다는 얘기다. 이 불안의 한복판에 하필 대만과 우리가 있다.》
대중 전쟁 ‘사면초가’ 몰린 日


많은 한국 시민은 ‘설마’할 것이다. ‘이 대명천지에 설마 우리에게 전쟁이 닥칠까?’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 대명천지는 지난 30∼40년 만의 특수한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지금 서울 강남을 활보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방공호에 들어갈 날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는 소비자들이 당신 생애에 배급제를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하면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100년 전 다이쇼 데모크라시(1905∼1931년)를 만끽하던 일본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자유와 소비를 만끽하던 일본인들은 만주사변(1931년)이 시작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방공호와 배급제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1930년대 중반의 세계는 장차 누가 패권국이 될 것인지 가늠키 어려웠다. 미국은 아직 태평양을 제패할 만한 해군력을 갖추지 못했고, 소련의 스탈린이 추진한 2차 5개년 계획은 진행 중이었다. 일본 군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이 이 양국의 국력 신장을 따라갈 수 없을 걸로 보고 그 이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미중 대립도 일각에서는 시간이 중국 편이 아니라는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만주사변 후 중국 내지로 점점 압박해오는 일본에 대해 당대의 지식인 후스(胡適)는 놀라운 구상을 피력한다. 즉, 중국이 일본을 이겨내려면 미국과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두려워 말고 2, 3년간 계속 패배하면서 버텨야 한다. 큰 희생이 나겠지만 중국이 버티면 미소는 결국 대일전(對日戰)을 개시할 것이다. ‘일본은 지금 할복의 길로 가고 있다. 이를 중국이 도와주자’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할복은 혼자 마무리 짓기가 힘들다. 그래서 보통 가이샤쿠(介錯)라는 일종의 ‘할복 도우미’가 옆에 서 있다가 당사자가 할복을 개시한 뒤 마무리를 해주곤 한다. 후스는 일본이 멍청하게도 할복의 길로 접어들려고 하니, 중국이 가이샤쿠가 되어 주자고 한 것이다.

美 제친 日 해군 전력

일본 군부가 몇 달이면 끝난다고 호언했던 중일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되어갔다. 때리고 또 때려도 중국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때리는 손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처럼 스스로 지킬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그런 국가에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의 결사항전 의지를 확인한 국제사회도 지원을 시작했다. 소련은 1000대에 가까운 전투기와 소련인 조종사를 보냈고, 미국은 거액의 차관을 제공했다. 1939년 7월에는 미일통상항해조약 폐기를 통고해 일본을 압박했다. 1941년 3월에는 무기대여법을 제정해 아예 중국에 무상으로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베트남 북부와 홍콩을 통해 중국에 물자를 공급했다(이른바 장제스를 지원한다는 뜻의 ‘원장(援蔣) 루트’).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하와이 진주만 기습 당일인 1941년 12월 7일 아침, 항공모함 쇼카쿠(추정)에서 이륙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의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들(위 사진). 이날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3만1800t급 미 구축함 웨스트버지니아(아래 사진)를 비롯한 여러 척의 배가 파괴됐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난국을 타개하고 중일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으로 일본군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했다. 그곳에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당시 프랑스 본국은 이미 히틀러에 점령당한 상태였기에 여기는 무주공산이었다.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미국은 이제 일본을 용납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양측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고,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해 마침내 미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대표적 순양 전함인 하루나. 전장이 222m에 달해 당시 해군에 집중 투입된 군사비 상황을 보여준다. flickr.com
일본은 왜 이리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못했을까.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존재하지만 ‘돈’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전쟁이 터지면 특별회계로 임시군사비를 편성하는데 이 예산은 군사기밀이라고 해서 의회도 대장성(大藏省)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임시군사비를 포함한 직접군사비는 1931년에 4억6000만 엔 정도였지만, 1940년에는 약 80억 엔으로 급증했다. 이 막대한 돈이 의회는커녕 정부의 통제도 없이 군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이 엉뚱한 데 쓰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군사비가 편성되었는데, 군부는 이 돈을 중국과의 전쟁 수행에만 쓴 게 아니라, 아무도 승인하지 않은 미국·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빼돌렸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태평양에서의 일본 해군 전력은 미국을 능가한 상태였다. 이러니 전쟁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국가보다 조직 위한 개전 결정

분파주의(sectism)도 원인의 하나였다. 미국을 부담스러워했던 해군은 원래 대미개전(對美開戰)에는 소극적이었다.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은 자연히 영미와의 대립을 촉진할 것이기에, 애초에 해군은 반대였다. 그러나 막상 독일이 동맹 체결을 제의하자 해군은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와 관련해 한 해군 제독은 대미관계의 악화가 예상되면 해군 군비 예산이 늘어날 것을 기대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1939년 육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던 해군의 임시군사비는 1941년 육군의 절반 수준으로 팽창했다. 나라의 운명보다도 자기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어처구니없는 개전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요시다 유타카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떤 사회가 한 세대 정도 그 체제를 유지하면 사람들은 그게 영원할 줄 안다. 하지만 폴란드가 한국 무기를 대규모로 사는 일을 몇 년 전만 해도 과연 상상할 수 있었을까. 종전 후 한 세대 만에 미국과 베트남이 찰떡궁합이 되어 중국을 압박하는 모습을 과연 몇 명이나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고, 바로 앞에 낭떠러지나 갈림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역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전쟁 발발에 대한 감각도 마찬가지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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