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6·25 때 아들 6명 잃었다"..충정아파트 통째 삼킨 희대의 사기꾼

김성화 에디터 2022. 6. 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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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품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 결국 철거된다


고층 빌딩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초록색 외관, 쩍쩍 갈라진 낡은 벽.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품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자 국내 최고령 아파트인 '충정아파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8개국 차트에서 1위를 휩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의 배경으로도 유명세를 떨친 충정아파트는 몇 년 전부터 생활하수가 건물 내벽 사이로 스며들면서 붕괴 위험이 있다는 전문가의 진단에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1930년대 서울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던 충정아파트의 우여곡절 가득한 옛이야기들을 전해드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그곳에 벌어진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역에서 불과 100m. 초역세권에 위치한 충정아파트는 1937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국내 최고령 아파트(서울시 건축물대장 기준)입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아파트로 1932년에 지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인 건축가 도요타 다네오(豊田種松)가 지어서 도요타의 이름을 따 '도요타 아파트' 또는 '풍전 아파트'로 불렸습니다. (※ 도요타를 한자로 읽으면 '풍전(豊田)')

1930년대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가 지은 '충정아파트' 모습. 당시에는 '도요타 아파트' 혹은 '풍전 아파트'로 불렸다. (사진=TBS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 영상 화면 캡처)


1930년대 높은 건물이 없던 당시였기에 이 아파트는 지상 8층짜리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유명했습니다.

주로 일본인들이 임차해 살았고 최신 설비까지 갖춰 일본인들 사이에서 신혼집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시작을 알린 충정아파트는 한국전쟁 이후 풍파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들이 아파트 지하를 인민재판소로 사용하며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또 미국은 서울 수복 이후 '트레머호텔'로 부르며 유엔군 전용 호텔로 쓰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외신기자가 촬영한 당시 모습. 군인들 뒤로 충정아파트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TBS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 영상 화면 캡처)

"한국전쟁 때 아들 6명 잃었다"…충정아파트 통째 삼킨 희대의 사기꾼

한편 충정아파트는 대국민 사기극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일명 '가짜 반공의 아버지 김병조 사기 사건'입니다.

대사기극 전말은 이러했습니다.

1959년 어느 날, 한국전쟁에서 아들 6명을 모두 잃었다는 김병조라는 남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사연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가 이를 계기로 김병조는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고 대대적으로 방송 뉴스까지 타게 됩니다.

"한국전쟁에서 아들 6명을 모두 잃었다"는 거짓말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은 김병조(오른쪽) (사진=e영상역사관 '대한늬우스' 캡처)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6789128&plink=YOUTUBE&cooper=DAUM ]

뿐만 아니라 김병조의 절절한 사연에 미국마저 감격해 건물 전체 보수를 싹 마친 뒤, 1961년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정부에 이 건물을 양도했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김병조에게 일종의 선물처럼 건물 관리권을 통째로 넘겼습니다. 당시 건물의 가치는 5천만 원, 현재 시세로 약 19억 6천만 원입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김병조는 건물 이름을 '코리아나호텔'로 바꾸고 5층 옥상에 불법 증개축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병조가 호텔을 열자마자 투서 한 통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도착하면서 그의 대사기극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투서 내용은 이랬습니다.

'김병조에게는 아들이 없다.'

확인 결과 투서의 내용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벼락부자가 된 김병조는 하루아침에 철창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건물은 당시 국세청인 사세청이 몰수했습니다.

이후 몇 명의 건물주를 거치면서 호텔로 운영되다 1975년 건물 저당을 잡고 있던 서울은행으로 명의가 넘어가면서 건물은 다시 호텔에서 아파트가 됐습니다.

'대국민 사기극' 들통난 김병조.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 (사진=TBS '최초의 아파트 충정 아파트' 화면 캡처)

충정아파트 1/3, 어쩌다 뜯겨나갔나

1979년에는 현재 충정아파트의 형태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건물이 잘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건물 북쪽을 지나가는 충정로가 8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건물의 1/3이 뜯겨나간 것입니다.

이때 총 52가구 중 19가구가 철거됐는데, 철거된 19가구 중 3가구가 건물 중앙계단 자리에 집을 증축하면서 현재와 같은 독특한 모습을 띄게 되었습니다.

철거를 앞둔 국내 최고령 아파트 '충정아파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편 충정아파트는 2008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재개발 대상이 되었으나 여러 문제들로 인해 보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서 재개발도 중단됐습니다.

당초 박원순 전 시장 재임 당시 지역 유산을 지키는 차원에서 보존하는 것으로 결정됐으나, 안전 문제와 주민 갈등 등이 끊이지 않으면서 결국 충정아파트는 철거하게 됐습니다.

1930년대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민간인 학살 현장으로, 또 대국민 사기극 중심에 오르내리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인 충정아파트는 격동의 한국사를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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