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김옥균과 미야자키 도텐의 선상 음주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2021. 4.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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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하기까지 1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일본의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국사범인 그를 정부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불편해했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훗날 총리가 되는 이누카이 쓰요시, 아시아주의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 근대사상의 태두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그의 교유범위는 광범했다. 김옥균은 활달하고 ‘센터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이누카이는 김옥균을 데리고 일본철도회사 사장을 방문했다. 서로가 초면이었다. 달변인 김옥균은 이 자리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세상사에 대해 떠들었다. 이누카이는 가끔 거들뿐이었다. 거드는 그를 보고 사장이 말했다. “일본어를 참 잘하시는군요.” 그를 김옥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그에게 반했던 사람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미야자키 도텐이다. 도텐이 누구인가. 쑨원의 맹우로 일평생 중국 신해혁명에 헌신해 중국과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김옥균은 스무 살 어린 도텐(당시 20세)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도텐의 회고담에 따르면 1891년 도쿄에서 김옥균을 처음 만났다. 언제나처럼 말이 많은 김옥균이 임기응변(臨機應變, りんきおうへん)의 일본어 발음을 ‘인키오헨’이라고 하자 같이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선생님, 인키오헨이 아니고 린키오헨입니다”라고 고쳐주었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게 그거잖나. 자네는 인기오헨(因機應變)도 모르나”라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3년 후 도텐은 다시 김옥균을 찾아왔다. 출타했다 돌아온 김옥균은 용건도 묻지 않고 “오늘 밤 달이 좋은데 앞바다에 배나 띄우고 노세”라며 하인에게 준비를 시켰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김옥균과 그의 제자, 도텐 세 사람은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거듭했다. 도텐은 앞에 조선인이 앉아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은 이미 황혼의 나라이니 중국혁명으로 동양 전체의 판도를 바꾸지 않으면 조선도 변혁할 수 없다며 한 시간을 떠들었다. 듣고 있던 김옥균은 “정말 재밌네. 인연이야,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네”라며 무릎을 쳤다. 그러곤 흉중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도 아시아 문제는 중국의 흥망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에 비하면 조선 문제는 작은 문제다. 이건 비밀인데 곧 상하이로 가 이홍장과 담판할 것이다.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고. 도텐은 경호원으로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김옥균의 거절 이유가 재밌다. “아니, 후의는 고마운데 자네는 안 되네. 이번 중국행은 기밀유지가 중요한데 자네의 용모나 풍채는 이목을 끌어 안 돼.” 인터넷에서 도텐의 사진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거다.

이 두 사람은 왜 기어이 중국에 가려고 했던 것일까. 중국이 어떤 사회를 건설하느냐가 자기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세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중국은 근대사회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이것이 19세기 말 중국에 대한 질문이었다. 김옥균은 “자 얘기는 끝났으니 오늘밤은 마시세!”라며 술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조선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도텐에게도 노래를 부르라고 재촉했다. 도텐이 시를 읊자 이번에는 동승한 제자에게 강요했다. 숫기가 없던 그는 뱃전을 붙잡고 “유쾌! 유쾌!”라고 소리쳤다. 그때 물고기 세 마리가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선생님께서는 ‘길조다!’라고 더없이 기뻐하시며 다시 축배를 들고 노래를 부르셨다.”

그러나 길조가 아니었다. 곧 상하이로 건너간 김옥균은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손에 든 채였다. 이제나저제나 김옥균의 호출을 기다리던 도텐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발행된 호외를 받아보고는 엉엉 울었다. 김옥균 43세, 도텐 23세였다. 그는 김옥균의 뜻을 품고 기어이 중국으로 들어가 신해혁명에 뛰어들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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