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야구학]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포심·커터·체인지업 구분 어려워
커브도 터널에 들어와 위력 커져
실제 구속보다 체감 속도 더 빨라
지난 8월 말,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 맷 윌리엄스 KIA 감독이 류현진(33·토론토)의 피칭에 대해 코멘트한 것이다. 윌리엄스 감독은 “메이저리그(MLB) 다른 투수들과 비교하면, 류현진은 구속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투수가 아니다. 대신 좋은 커맨드(목표 지점에 공을 던지는 능력)를 가졌다. ‘피칭의 아트’를 잘 이해하는 투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류현진이 누구에게나 자주 듣는 칭찬이다. 흥미로운 말은 그 다음에 나왔다. 윌리엄스 감독은 “애리조나 코치로 일했던 2013년 (LA 다저스 신인) 류현진의 피칭을 자주 봤다. 류현진과 대결한 애리조나 타자들에게 물으니 ‘모든 구종이 똑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MLB 내셔널리그 홈런왕 출신(1994년 43개) 윌리엄스 감독이라고 해도 더그아웃에서는 류현진 피칭의 진가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타석에서 투수를 직접 상대해야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윌리엄스 감독은 “내 기억에 류현진은 오른손 타자를 상대로 몸쪽 컷 패스트볼을 효과적으로 던졌다. 싱커(투심 패스트볼)는 반대 방향(오른손 타자 바깥쪽)으로 굉장히 잘 떨어졌다. 여기에 체인지업이 똑같은 터널(tunnel)을 통해 나오면 구종을 구분하기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윌리엄스의 코멘트는 류현진 피칭에 대한 수많은 설명 중 가장 구체적이며 실체적이었다. (외야 전광판의 카메라가 찍은) TV 중계 화면이나, 더그아웃에서 보는 각도가 아니라 타자 시점에서 바라본 투구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tvN에서 방송된 류현진 다큐멘터리 ‘코리안 몬스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저스 시절 동료였던 저스틴 터너가 “류현진은 모든 공을 똑같은 폼으로 던진다. 타자 입장에서는 정말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는 MLB를 보며 수많은 괴물 투수를 만난다. 그들은 시속 100마일(161㎞)이 넘는 강속구를 뿜어내고, 무서울 만큼 꿈틀거리는 싱커를 던진다. 브레이킹 볼의 변화도 예리하다. 그러나 타자들은 류현진의 피칭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지난해 류현진의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시속 145.9㎞였다. MLB 투수들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스피드로 류현진은 2019년 양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2.32)을 기록했다.
올해 패스트볼 류현진의 평균 스피드는 144.5㎞로 더 떨어졌다. 시즌 초반에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류현진은 에이스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코로나19로 인해 단축된 올 시즌 12차례 선발 등판에서 5승2패 평균자책점 2.69(아메리칸 리그 4위)를 기록했다.
이유가 뭘까. 커맨드가 좋아서? 사실이지만, 윌리엄스 감독의 표현대로 ‘피칭의 아트’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윌리엄스 감독이 이미 힌트를 줬다. 똑같은 터널을 통해 나오면 구종을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이 최근 MLB가 투구 궤적을 분석하는 이론인 ‘피치 터널(pitch tunnel)’이다.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시간
피치 터널을 소개한 여러 사이트 중 팬그래프닷컴의 하드볼타임스 자료가 가장 상세한 것 같다. 덕분에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피치 터널의 원리를 시각화할 수 있었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구종과 관계없이 일정한 지점까지 비슷한 궤적으로 날아온다. 어느 지점부터는 구종과 코스를 인지한다. 그리고 스윙 여부를 결정한다.
피치 터널은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부터 타자가 구종을 분간하는 지점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깜깜한 터널에 들어간 자동차의 종류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터널 구간에서는 구종을 파악하기 힘들다. 터널에서 빠져나오면 자동차의 크기와 종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터널 포인트를 빠져나온 뒤에야 공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터널이 길면 타자가 투구를 파악할 시간이 그만큼 짧아진다. 패스트볼은 타자가 스윙하기 전에 포수 미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변화구는 스윙 궤적을 피해 꺾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터널이 짧다면 타자가 대응할 시간이 길어진다. 투수가 공을 던지자마자 패스트볼이라는 걸 타자가 안다면 어떻게 될까. MLB 타자는 100마일의 강속구도 쳐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자는 변화구에도 속지 않는다.
때문에 타자가 체감하는 속도는 스피드건에 찍히는 숫자와 차이가 있다. 류현진처럼 디셉션(투구 전 허리 뒤로 공을 감추는 동작)이 좋은 투수가 피치 터널까지 길다면 타자가 구종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류현진이 140㎞대의 공을 자신 있게 던지고, 타자들이 그걸 쉽게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류현진의 변화구는 피치 터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의 최고 무기는 체인지업이다.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가 가라앉는 공이다. 왼손 투수의 서클 체인지업은 우타자 바깥쪽으로 휘면서 떨어진다.
피치 터널을 떠올리며 류현진의 피칭 데이터를 봤다. 올 시즌은 코로나19 등 변수가 많으니 지난해 기록을 살폈다. 2019년 그의 체인지업 평균 스피드는 시속 128.7㎞였다. 패스트볼보다 시속 17㎞ 느렸다.
체인지업은 패스트볼처럼 보여야 타자를 속일 수 있다. 그렇다고 체인지업 스피드를 인위적으로 높일 순 없다. 대신 피치 터널이 길면, 그래서 타자가 두 구종을 구분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17㎞의 속도 차로도 충분히 속일 수 있다. 류현진의 체인지업 구종 가치가 높은 이유다.
2013년 MLB 진출 후에도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의 조합으로 ‘투 피치’를 구사했던 류현진은 2017년 컷 패스트볼을 장착했다. 그가 “날 있게 해준 공”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변화였다.
컷 패스트볼은 포심 패스트볼에 가까운 스피드(2019년 류현진의 경우 평균 시속 140㎞)로 날아간다. 그러다가 타자 앞에서 살짝 꺾인다. 변화 폭이 작은 대신 다른 변화구보다 빠르다. 포심 패스트볼과 터널을 공유하는 구간이 길어 타자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피치 터널 효과가 가장 큰 공 배합일 것이다.
류현진은 투심 패스트볼도 던진다. 싱커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 공은 포심 패스트볼에 가까운 스피드로 날아가다 아주 살짝 가라앉는다. 터널 구간이 가장 길지만, 변화 폭이 작아 타자가 포심 패스트볼로 인식해 스윙해도 공을 맞힐 가능성이 크다.
류현진의 다섯 번째 무기는 커브다. 가장 느리며(2019년 평균 시속 116.9㎞), 가장 큰 변화(위에서 아래로)를 만든다. 터널 구간이 가장 짧을 것이다.
2017년 이전 류현진의 커브는 느리고 회전력이 약했다. 타자 머리 위에서 낙하하는 행잉(hanging, 낙폭이 크지 않은) 커브였다. 그러나 2018년 이후 류현진의 커브 회전수는 분당 2500회로 상당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류현진의 커브는 터널 안으로 들어왔다. 타자의 가슴 높이를 향하다 땅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다저스 시절 그의 동료였던 클레이턴 커쇼도 그의 커브 궤적 변화에 놀랐다고 한다. 류현진은 2018년 시범경기에서 “커브를 더 강하게 던져서 타자 앞에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류현진은 구종 습득 능력이 뛰어난 투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듣기 좋은 칭찬이지만, 그렇게 짧게 칭찬하고 끝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종을 장착하거나 강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안정된 투구 폼과 엄청난 노력이다.
밝고 유머러스한 캐릭터와 달리 류현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나게 훈련했을 것이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MLB 레벨에 있는 선수의 구종이 단기간에 그렇게 좋아질 리 없다.
또 하나. 류현진의 안정된 밸런스가 커브를 빠르게 흡수했을 것이다. 하체로부터 시작해 릴리스까지 이어지는 류현진의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기본기가 탄탄하기에 응용 기술(커브) 장착 효과가 큰 것이다.
터널은 릴리스에서 결정된다
그림으로 보면 피치 터널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루나 이틀이면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관건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만드느냐다. 그건 평생을 투자해도 어려운 일이다.
앞선 칼럼에 ‘플라이볼 혁명은 현상에 대한 설명이며, 최적의 히팅 포인트에서 강한 타구를 만드는 게 타격의 본질’이라고 썼다. 피치 터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터널 이론은 어떤 투구가 좋은지를 소개하는 툴이다. 중요한 건 피치 터널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한 논의다.
하드볼타임스의 ‘피치 터널링 투수들은 실제로 어떻게 공을 던질까’라는 칼럼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어떤 투수들은 터널 포인트에 작은 후프를 설치, 모든 공이 이곳을 통과하도록 훈련했다고 한다. MLB 투수 전문가들은 이런 훈련법에 비관적이다.
타자는 공이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구분할 수 있다. 그건 타자 눈에만 그럴 뿐이다. 투구는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즉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 궤적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래서 피치 터널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중요한 건 투구마다 몸의 움직임을 정확히, 똑같이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투수는 터널 포인트를 의식할 게 아니라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하드볼타임스는 이를 위한 요소로 ▶투수판을 밟는 위치 ▶투구 템포 ▶스트라이드의 거리와 방향 ▶피니시와팔로 스루 등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기사는 ‘좋은 투구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터널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전부’라고도 주장했다.
시속 100마일의 강속구를 뿜어내는 투수가 안정된 폼으로 변화구까지 잘 던진다면, 그래서 피치 터널까지 잘 활용한다면 정말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야구의 신은 지금까지 그런 투수를 세상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속도의 시대에서는 시속 100마일 강속구를 던지는 재능보다, 90마일의 공을 효과적으로 던지는 메커니즘이 더 희귀하다. 지난해 류현진이 MLB 전체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것이 그 증거다. 류현진 피칭 이야기는 다음 편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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