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알렉스 퍼거슨 그리고 노무라 감독

조회 46,9302025. 3. 27. 수정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바둑 영화 ‘승부‘입니다. 어떤 역할이냐고요? 거기서도 저는 캐스터입니다.
어제가 개봉 첫날이었는데 연락이 엄청나게 왔습니다. 잘 봤다고요. 역시 종합예술, '영화'의 힘은 엄청난가 봅니다.
촬영 자체도 아주 재밌었어요. 아주 특별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바로 김형주 감독과의 캐스팅 미팅이었습니다.

왼쪽 모니터의 뿔테 안경이 저입니다. <사진 - 본인>

저와 김형주 감독은 영화사 사무실에서 믹스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부산 사투리가 살짝 남아있는 김형주 감독은 자신을 오랜 롯데 팬이라고 소개하면서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대본을 제가 썼는데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평평합니다. 또 이게 실화이다 보니… 사실 이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캐스터 님도 아시죠?”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훈현과 이창호, 이 특별한 사제 간의 이야기는 80, 90년대를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바둑에 관심이 없더라도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화가 평평한데 사실 바둑이라는 종목이 중계도 심심합니다. 조곤조곤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걸 좀 깨보려고 합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저는 흥미가 생겼습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출연을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캐스터 님이 평소 야구 중계 때 하시는 샤우팅을 여기서도 해주시면 됩니다.“
”네? 바둑 중계 캐스터가 샤우팅을요?“
”네. 그래서 캐스터 님을 이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은 겁니다. 이 역할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역할입니다.“
‘오! 중요한 역할이라고?’
저는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여기가 클라이맥스라고 캐스터 님이 선언하는 거예요. 평평한 이야기에 절정을 찍어주는 역할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저는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할게요. 하죠. 뭐. 재밌겠어요. 해볼게요.“

저는 김형주 감독의 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생각이 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바로 ‘해버지‘ 박지성 선수의 맨유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2010년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 맨유와 AC밀란의 경기에서 피를로를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던 박지성 선수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로커에서 어떤 지시를 내렸는가를 웨인 루니가 공개했던 적이 있죠.
“네가 해야 할 일은 볼을 만지는 것이 아니다. 패스하는 것도 아니다. 피를로다. 그게 전부다.“
유명한 이야기죠. 그런데 저는 이 버전이 아닌 다른 버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제가 그즈음 들었던 걸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겁니다.

박지성과 피를로가 14년 만에 대결을 펼쳤던 2024 아이콘 매치 <사진 OSEN>

AC밀란과의 16강 경기를 앞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팀 훈련장. 선수들은 훈련하고 있었고 퍼거슨 감독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들어가려는 참에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 선수를 호출했다고 합니다.
“지!(박지성 선수의 애칭)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훈련 구장 잔디에 특이한 무늬를 가진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답니다. 퍼거슨 감독은 그 나비를 바라보면서
”자연은 참 신비롭지?“

퍼거슨 감독과 박지성은 조용해진 그라운드 곁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잠시 지켜봤습니다. 이후 퍼거슨 감독은 침묵을 깨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번 AC밀란과의 경기에서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을 맡길 거야.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야. 네가 이걸 해낸다면 우리는 이길 수 있어. 만약 네가 이 임무를 해내면 너는 누구보다 빛날 거야.“
박지성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피를로를 막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하나 더 풀겠습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더 풀겠습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감독 고 노무라 가쓰야 감독(일본 데이터 야구-ID야구-의 창시자로 김성근 감독의 롤모델로 야구팬들에게 알려진 인물)과 전문 마무리 투수의 시초, 에나쓰 유타카의 이야기입니다.
고 장명부 선수의 정신적인 스승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좌투수 에나쓰 유타카는 NPB에 데뷔하면서 삼진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을 갈아 치웠습니다. 그런데 선수 생활의 황금기로 접어들 무렵, 고난이 들이닥칩니다. 손가락에 혈행장애가 발병한 겁니다. 그는 긴 이닝을 투구할 수 없었습니다.
좌절한 에나쓰에게 노무라 감독이 다가갔습니다.
“자네, 나와 술 한잔하지?”

NPB 고 노무라 감독. 그가 에나쓰를 만났을 때는 감독 겸 선수였습니다. <사진 OSEN>

에나쓰는 노무라 감독의 호텔방으로 갔습니다. 노무라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천천히 술을 마셨습니다. 에나쓰는 그를 그저 바라봤습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노무라 감독은 그동안 에나쓰에게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천천히 술을 마셨습니다.
새벽 다섯 시 무렵. 창밖에서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출의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자 노무라 감독은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들이킨 후 에나쓰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자네. 나와 혁명을 함께 하지 않겠나?“
에나쓰는 물었습니다.
”어떤 혁명입니까?“
노무라 감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기는 경기의 마지막을 맡아주게.“

”예. 따르겠습니다.“
이후 에나쓰 유타카는 현대 야구 최초의 전문 마무리투수가 됐습니다. 이 시기는 1977년으로 라루사 감독이 데니스 에커슬리에게 전문 마무리를 맡겼던 1988년보다 무려 11년이 빠릅니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습니다.

저는 박지성이나 에나쓰 같은 전설들과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없겠죠? 제가 이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감독의 설득과 협상의 기술입니다.
분야와 종목은 다르지만 김형주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 고 노무라 감독은 본인이 원하는 일을 특정인에게 맡기기 위해서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1. 대면 접촉
2. 해당 업무의 중요성 강조
3. 임무 부여

사실 저는 배역의 이름도 없는 ‘아나운서 역’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클라이맥스를 선언하는 역할‘이라는 말에 설득당했습니다. 그리고 제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몰입해서 신나게 일했습니다.
퍼거슨 감독도 아마 ’지! 닥치고 쟤 막아!’라고 해도 됐을 거고, 노무라 감독도 그냥 ‘이기는 경기 9회에 한 이닝만 던져.’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 두 감독은 그들이 맡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두 선수에게 강조했습니다. 특히 에나쓰의 경우는 당시 전문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본인을 퇴물로 취급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노무라 감독은 이 역할을 ‘혁명’으로 표현했습니다.

조우진 배우와 함께 연기라는 걸 해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사진 - 본인>

종목을 막론하고 현재 우리 프로스포츠에서 감독들은 선수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선수들이 자신의 역할을 코치나 감독을 통해서 직접 듣지 않고 기사를 통해서 먼저 접하거나 아예 자신의 임무도 모른 상태로 관성적으로 시즌을 치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그 역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감독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승부 공식 포스터

영화 승부의 개봉에 맞춰서 제가 겪었던 김형주 감독과의 에피소드를 여러분께 공개해 드렸습니다.
영화를 보시면서 마지막 사제대국을 볼 때 잠시 5초 정도라도 눈을 감고 들어보세요.
‘어? 이거 야구 중계인가?‘
하는 마법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반면, 바둑 중계방송을 좋아하시는 팬들이 느끼셨을 이질감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저 넓은 마음으로 영화를 즐겨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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