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동원, 이름 없는 피해자들] ④ “통곡의 가족사…피해자를 넘어 ‘연대’로” 박철기·오정연씨 증언

박지혜 기자 2025. 8.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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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인천일보가 정부의 재조사를 간절히 기다리는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작성해나가는 증언집 네 번째는 박철기(82)·오정연(80)씨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에서 출발했지만, 전국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연합으로써 함께 서서 20여년 활동하고 있다. 이에 하나의 증언집에 담는다.

박씨의 아버지는 왼쪽 눈을 잃은 채 평생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강제로 끌려간 현장에서 일본인에게 다친 것이 분명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 사연을 자식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쉰여덟,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오 씨의 삼촌은 집안의 '금지옥엽'이자 자랑이었다. 그러나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간 지 반년도 안 돼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통보가 돌아왔다. 향후 오씨는 창씨개명된 이름을 추적해 삼촌의 기록을 찾아냈고, 그 억울한 죽음을 역사에 되살리고자 결심했다.

▲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동원된 뒤 사망한 삼촌의 원혼을 달래주고 싶다는 오정연(80)씨가 기억하는 증언을 상세히 털어놓고 있다. /사진제공=경기도

#1. 금지옥엽 '학도병'을 가슴에 묻다(오정연)

우리 삼촌은 할머니가 손주 볼 나이에 낳은 아주 귀한 아들이었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선조 덕에 더욱 오냐오냐, 귀하게 기른 자식. 우리 아버지가 동경제대(동경제국대학) 의과를 다녔듯, 삼촌도 전문학교 이상을 다닌 엘리트였다니 틀림없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런 삼촌은 1944년 10월 29일, 학도병으로 징병됐다. 나중에 찾은 임시군인군속계(일제 당시 병적기록 담긴 일본 문서) 기록엔 '소화19년(1944년) 10월 20일 조선 제25부대로 편입'됐다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그즈음 억지로 끌려가 배치된 듯하다.

삼촌의 발자취는 그렇게 끊겼다 갑작스러운 사망통지서로 돌아왔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45년 1월 9일의 일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아들이 뜬금없이 중국 충칭이란 데서 사망했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셨다. 3일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그는 깨어나서도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어 90세가 넘도록 서슬 퍼런 한을 품고 사셨다.

그러니 우리 가족 사이에서 '징병'은 함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가 또다시 자식 잃은 슬픔을 떠올리실까, 식구들에게 직접 "할머니한테 '징병'에 대해선 절대 함구하라"는 함구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징병에 끌려갔던 삼촌은 족보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 삼촌이 죽고 얼마 후 6·25전쟁이 나 면사무소가 불타는 바람에 제적부가 타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처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누가 제사를 지내 주느냐, (족보에) 올릴 거 없다"며 자식을 가슴에 묻은 것이다.

"뭐 잘난 일이라고." 어느새 '창피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삼촌의 죽음은 우리 가족 사이에서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일로 여겨졌고, 유령이 된 삼촌은 점차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듯했다.

#2. '나카야마 진'이 된 '오진'의 발자취(오정연)

기억 속에 사라진, 그러나 분명 젊은 날 아프게 희생된 삼촌의 존재를 되살려야겠다 결심하게 된 건 2000년대 초반이었다. 정부에서 일제 강제 동원 피해 신고를 하라고 할 때, '아, 우리 삼촌은 내가 들은 바가 있으니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삼촌의 흔적은 이상하리만큼 찾을 수가 없었다. 오씨 성에 외자 '진'을 붙인 '오진' 두 글자 찾기가 어찌나 어려웠는지, 할 줄 모르는 컴퓨터를 배워다 오씨 성 나온 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하고 검색해 봐도 '오진'의 존재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쯤, 우연히 우리나라 성씨가 대개 일본의 어떤 말들로 창씨개명 됐다는 자료를 보고 오 씨가 많이 창씨명 했다는 '중산(나카야마·中山)'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중산 진', 그러니까, '나카야마 진'의 발자취는 '피징용사망자연명부'에 도달했다. 소화 20년(1945년) 1월 9일, 오택씨의 아들이자 천안군 출신 군인의 사망 기록. 그렇다, 삼촌이었다.

그를 찾고서도 집안 식구들은 여전히 말도 못 붙이게 했다. 우리집, 괜찮은 집안에 속된 말로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 남기고 싶지 않다나.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정말 억울함이 없도록 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 박철기(82·왼쪽 사진)·오정연(80)씨는 경기지역을 비롯해 전국의 강제 동원 미인정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를 힘겹지만,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는 사실상 정부가 업무를 포기함에 따라 유일한 강제 동원 피해 신고 접수처다./사진제공=경기도

#3. '왼쪽 눈'을 잃은 아버지를 생각하며(박철기)

아버지는 왼쪽 눈이 보이지 않으셨다. 젊을 적 다친 눈 때문에 평생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언제, 어떻게 다친 거냐 물으면 끝끝내 답하지 않으셨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우연히 아버지의 왼쪽 눈이 일제시대 국내 어딘가로 일을 끌려가 그리 되셨단 걸 알게 됐다. 무엇이 그리 창피하셨는지, 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도 '징용' 이런 소린 알지도 못하고 자랐는데 말이다. 당신만 아는 비밀을 품고 아버지는 환갑도 되지 않아, 쉰여덟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떠나시긴 너무 젊으셨다.

월 5000원. 5000명도 넘는 회원 중엔 달마다 적기도 많기도 한 회비를 꾸준히 내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저마다의 이유야 어찌 됐든 사정이 이러니 수많은 회원을 관리하며 사무실 월세에 관리비, 전기세까지 내기엔 각박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일찍 떠나신 아버지의 나이, 50대의 중년이 된 나는 국내에서 강제 동원됐던피해자들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경기피해자 연합회'를 운영했다.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정을 위함이었기도, 왼쪽 눈으로는 끝내 세상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위함이기도 했다.

기증받은 사무실에서 시작해 경비 일을 하며 번 돈을 보태고, 누군가 준 돈을 보태며 연합회 활동은 이어졌다. 경기도 사람이 아니어도 전국 각지에서 봉사 차원으로 몰려든 사람들 덕분이었다.

물론, 여든을 넘긴 지금도 컴퓨터로 징용 피해자 명부를 하나하나 일일이 작성하고, 하도 일이 고되 두 번이나 쓰러지기도 했다. 집사람은 '징용'이라면 손도 못 대게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누군가는 이름을 잃고, 누군가는 창피하게 여겼던 역사와 오랜 시간이 지나서라도 빼앗긴 명예를 회복하고 싶고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남아있는 한, 멈출 수는 없다.

▲ 박철기(82)·오정연(80)씨는 경기지역을 비롯해 전국의 강제 동원 미인정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를 힘겹지만,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는 사실상 정부가 업무를 포기함에 따라 유일한 강제 동원 피해 신고 접수처다./사진제공=경기도

#4.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박철기·오정연)

우리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가족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위한 연합으로 함께한다. 정부가, 경기도가 나서 우리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주길 한마음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국외 동원은 몇 차례 적지만 지원도 해주고 법도 생겼는데, 국내 동원은 한 번도 인정을 못 받고 조사도 못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엔 모두 '일본'이었는데, '본토에서 일해라' 명령 하나 달랐다고 그 사람들 손아귀 밑에서 일했던 게 달라지진 않는다.

현실이 멀게 느껴지는 건 이게 다가 아니다. 아흔이 넘은 아버지에게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가지고 와라, 당시 주소가 변경돼 확실하지 않으니 증명을 못 하겠다고 한다. 가슴 아프게 호적에서도 지워진 '오진' 삼촌은 영영 없던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름 있는 저명인사들 마저 "창피하지도 않으냐, 왜 돈 받아먹고 자꾸 달라고 하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옳지 않다. 희생에 대해 나라는 보상을 해주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김밥 한 줄 남에게 얻어먹지 않고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아도 꿋꿋이 걸어왔다. 하지만 한 목소리로 분명히 말한다. 더 이상 늦지 않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이다.

/박지혜 기자 p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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