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동원, 이름 없는 피해자들] ④ “들어주지도, 도와주지도”…유가족 단체의 외로운 투쟁

김현우 기자 2025. 8.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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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가족들은 대체 누가 위로해 주나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경기피해자聯
도 최초 등록 법인 … 신고 접수 역할
정부·지자체 지원 한 푼도 못 받아

협소 공간에 5500여명 기록 빼곡
5000원 회비 걷어 월 100만원 지출
에어컨·난방기 켜는 건 꿈도 못 꿔

유가족, 이 대통령·김 지사에 촉구
“실태조사, 국가 자존심 걸린 문제”
“진상규명 깨끗하게 매듭지어야”
▲ 박철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경기피해자연합회 회장이 의정부시 가능동 사무실 한켠에 가득하게 꽂혀 있는 피해자와 관련한 소송서류 등을 홀로 정리하고 있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역사를 잊지 말아달라', '피해를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외친 지가 10년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19일 오후, 의정부의 한 구도심. 누렇게 바랜 벽면, 시멘트가 벗겨진 낡은 주택들이 골목마다 길게 이어졌다. 인적은 드물었고, 한쪽은 재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그런 풍경 속에 작고 허름한 사무실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접수 중"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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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공간에 쌓인 '기록과 한숨'

사무실 안에는 70~80대 어르신 9명이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모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가족이다. 가족과 친척이 군인·군속, 노무원으로 끌려갔으며,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05~2008년 세 차례에 걸쳐 정부가 짧게 진행한 실태조사에서 피해 인정을 받은 대상자는 한 명도 없다. 2명은 피해신고를 했으나 심의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7명은 신고 접수 기한을 놓치는 등 이유로 한없는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료와 증언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를 입증할 수 있다. 일부는 국가기록원 소장 자료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조사와 기록 책임을 포기하면서, 이러한 증거를 활용할 수도 없는 상태다.

그래서 고령에 접어든 유족들이 택한 길은 단체를 꾸리는 일이었다. 제대로 걷기 힘들고, 몸이 아파도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만이라도 이루자"는 마음으로 2015년 이후 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부터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경기피해자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버티기는 쉽지 않다.

사무실은 6~8평 남짓한 협소한 공간이다. 5500여 명 피해자 관련 기록물이 빼곡히 차, 10명 이내의 회의조차 진행하기 버거운 실정이다. 단체 운영에 있어 외부 후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각각 5000원의 회비를 걷어 매달 35만원의 임대료를 비롯해 관리비·사무비 등으로 매달 최소 100만원 이상 지출을 감당해야 한다. 사실 유족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름에 에어컨, 겨울에 난방기를 마음껏 틀어 놓는 건 꿈도 못 꾼다. 이날 역시 체감온도 33도에 육박하는 폭염 날씨에도 에어컨이 꺼진 방 안에서 회원들이 땀을 흘리며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젊은 인력은 0명이다.

▲"희생자를 외면하는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이 단체는 경기도에서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해 최초로 등록한 법인이기도 하다. 도내 거주하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피해 유족도 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신고를 접수받고 있다. 사실상 국가가 운영을 포기한 '피해 신고센터'를 민간이 대신하는 격이다.

하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에 2023년 10월 지원 조례가 생기면서 관련 단체에 행정·재정적 지원을 가능케 했지만, 실질적인 혜택은 없었다.

유가족 김명로(67)씨는 이런 현실에 분노했다. 그의 오빠는 16살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정부와 지자체 모두 포기한다면, 희생자 가족들을 대체 누가 위로해주는가"라며 "과연 이 나라가 현 세대 젊은이들에게 애국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오정연(80)씨는 두 명의 삼촌이 강제동원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씨는 "피해자 실태조사는 식민지를 벗어난 국가 자존심의 문제다. 정부와 경기도가 유가족이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를 잃은 양영교(70)씨는 "이재명 대통령님, 김동연 경기지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제발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 문제를 깨끗하게 매듭지어달라"며 눈물을 훔쳤다.

오늘도, 외로운 현장에서 피해자 단체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잊히고 묻힌 이름들을 세상에 다시 불러내기 위해서다.

/김현우 기자 kimh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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