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이를 부탁해

한겨레21 2025. 4. 2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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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2024년 가을, 집 앞 풀밭에 아기 고양이가 나타났다. 늘 같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보니 거기만 풀이 움푹 파여 둥지 모양이 됐다. 먼저 밥을 챙겨주던 옆집을 따라 우리 집도 사료를 샀다. 몸에는 갈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있고 흰 양말을 신은 고양이는 입가에 밥풀 같은 하얀 무늬를 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친구가 ‘쌀밥’이라고 이름 붙였다.

겨울이 짙어지자 쌀밥이가 걱정됐다. 추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나 살펴봤지만 저녁이면 어김없이 자기 둥지에서 밥을 기다렸다. 도움이 될까 싶어 고양이 겨울 집을 만들었는데, 영리하고 경계심 많은 쌀밥이는 전반신(머리부터 허리까지)만 넣고 집 안의 밥만 먹을 뿐 눈보라 치는 날에도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쌀밥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쌀밥이에게 마음이 쓰이면서도 그가 인간을 간택하지 않는 이상 구조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햇볕에 데워진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구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밥을 챙겨주는 것 이상으로 책임질 엄두도 안 났다. 그런데 겨울 끝 무렵 쌀밥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콧물을 흘리며 한쪽 눈을 뜨기 힘들어했다. 밥에 약을 섞어주면 손으로 찍어서 맛보고는 밥도 안 먹고 가버렸다.

점점 심해지는 쌀밥이 상태에 고민이 깊어졌다.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가야 할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와 이웃들 집에는 이미 반려동물이 있었기에 임시보호도 고민이었다. 망설이는 사이 쌀밥이가 열흘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영 가버린 건 아닌지, 더 일찍 구조를 결정하지 못한 게 후회됐다. 친구는 쌀밥이가 머물던 자리를 보기도 괴로워했다.

그러다 쌀밥이 소식을 공유하는 카톡방이 들썩였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봄이 오려다 다시 눈 예보가 있던 즈음이었다. 한 친구가 입양 홍보지를 재빨리 만들어 올렸다. 그걸 신호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일사불란한 구조 작전이 시작됐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겁이 났는데, 서울동물영화제에서 본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2022)가 떠올랐다. 재개발이 예정된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를 낙원처럼 누비던 고양이 수백 마리를 하나하나 파악해 입양 보내거나 이사를 유도하던 사람들의 담담한 활동에서 느꼈던 숭고함을 생각했다.

나는 내 앞의 쌀밥이를 돕기로 마음먹고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포획틀을 샀다. 다른 친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진심 어린 홍보를 하고, 다른 친구는 자리를 비운 집사들을 대신해 반려동물들을 돌봤다. 병원비를 분담하고 필요한 물품을 마련했다. 역할을 미리 나눈 것도 아닌데 각자의 자리에서 선의로 움직였다. 신뢰하던 분이 임시보호 의사를 밝혀준 즈음, 쌀밥이도 구조에 응해줘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다.

늦은 밤,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 건너 임시보호처로 가는 길은 작은 모험 같았다. 한동안 마음 졸이고 고민했던 시간을 지나 퇴원한 쌀밥이를 데리고 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쌀밥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어떤 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긴장과 설렘, 피로가 감도는 차 안은 고요했다. 쌀밥이도 이동 내내 조용했다. 자신을 환대하는 곳으로 향하는 걸 아는 듯했다.

쌀밥이가 자리를 차지하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쌀밥이가 방에서 나와 집 안을 탐험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임시보호자가 보내주는 소식에 ‘쌀밥통신’이라 이름 붙였다. 밥과 약을 잘 챙겨 먹으며 건강을 회복해가는 쌀밥이가 책장의 책들을 와르르 떨어뜨리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진이나(반지성 고양이!), 츄르(막대 봉지에 든 습식 간식)를 먹으며 무아지경으로 눈을 찡그리는 모습을 볼 때면 벅찬 감정이 든다. 늘 긴장 속에 지내던 밖에서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다. 헌법재판소로부터 기다리던 소식이 오지 않아 애타던 3월을, 구체적인 생명을 구조한 기쁨에 기대며 건넜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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