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어른이 사라진 정치

김회경 2025. 4.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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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김장하 선생이 보여준 '어른'이란 의미
극단적 진영 대결로 원로 입지 좁아져
'윤 정부 2인자' 한 대행 출마 떳떳한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3일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해 미 2항공여단 헬기 격납고에서 지난 3월 발생한 산불 진화 작업에 참가했던 윌 마셜 대위 등 장병을 만나 격려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제공

경남 MBC가 2023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화제다.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 교육과 장학사업 등을 후원해 온 김장하 선생 얘기를 담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계기로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김장하 장학생'이었다는 인연이 재조명되면서 2년 전 다큐가 역주행하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본질은 김 선생의 삶이 증명하는 '어른'이란 말의 의미일 것이다.

문 전 대행은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인사말에서 김 선생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사법고시 합격 후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더니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갚으려거든 사회에 갚으라"는 말을 들었고 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줬다"고도 했다.

다큐를 접하기 전까지 미담 기사에 나올 법한 독지가 정도로 여긴 것은 오산이었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며 20대 초부터 사회 환원을 시작했고, 60년간 교육 및 장학사업뿐 아니라 연극, 문학, 언론, 역사, 인권, 여성 관련 활동 지원 등 지역 문화 전반에 걸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은 '어떤 어른이 돼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고민을 던져준다.

진영 대결의 장이 된 한국 정치에선 어른이 사라진 지 오래다.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이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대화와 타협이란 정치의 본령을 강조하는 정치 원로의 지혜와 경험칙을 폄하하는 환경 탓이 더 크다. 실제 윤 전 대통령에게 정치 복원이나 역사 인식에 대한 쓴소리를 하면,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이 앞장서 원로에게 험한 비난을 퍼부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 시절 '일극체제' '사당화'에 대한 쓴소리를 했다가 친명계와 개딸로부터 좌표 찍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강성 의원과 지지층으로부터 험한 꼴을 당할 바에야 입을 닫는 편을 택한 원로들이 적지 않다.

지금과 같은 권력 공백기일수록 중심을 잡아줄 어른의 부재는 뼈아프다. 이런 와중에 55년간의 공직 경험을 갖춘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처신 논란이 일고 있다. 공정한 대선 관리자여야 할 한 대행이 대권에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 탓이다. 대통령 권한과 권한대행의 권한에 차이가 없다며 한미 관세협상을 서두르고, 영·호남 방문에 이어 한미 연합사를 찾아 군번을 대는 등 대선 출마자들의 레퍼토리를 따라하고 있다.

한 대행 지지자들은 보수·진보 정권에서 국무총리, 주미대사 등을 거친 '안정감'과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이끌 '통상전문가'라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하버드대 석·박사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까지 갖췄다. 그러나 대권 행보에 나서려면 윤석열 정부의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파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책임을 정리하는 게 순서다.

자신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이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며 찾아오자, 김 선생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처럼 묵묵히 사회를 지탱해 온 이들은 한 대행의 스펙보다 걸어온 길을 기억할 것이다. 윤 정부의 국정 2인자였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총을 겨눈 비상계엄 선포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도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은 부작위를.

한 대행이 최근 공개 석상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권력의 정점에 올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소임은 아닐 것이다. 떳떳하고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어른 김장하'를 보길 권한다.

김회경 논설위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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