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것을 치웠더니 또 험한 것이 기어나왔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5. 5. 3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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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5월27일 TV토론에서 방송에 나가기 부적절한 언행을 하고 있다. 사진=MBC 영상 갈무리

“너무 일찍 축포를 터뜨리지 맙시다. 그것이 기어나온 곳은 아직도 비옥합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히틀러를 의미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이 문장은 파시즘이 배양되는 조건을 일소하지 않는 한 히틀러 같은 괴물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경고를 섬뜩하게 묘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놀랍게도 지난 3차 대선토론을 보던 중에 이 문장이 떠올랐다. 이준석이 내뱉은 그 말 때문이다. 충격적이었다. 어떤 제재도 없이 공중파를 타고 전송된 그 끔찍한 언어폭력에 모욕을 당한 사람들이 또다시 밤잠을 설치며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내란수괴를 파면하고 치루는 대선에서 난데없이 또 하나의 정신적 내란과 마주쳤던 것이다.

윤석열이 의회를 침탈했다면, 이준석은 공론장을 침탈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공적 합의와 윤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공론장을 구성하는 중요 준칙이 바로 '재현의 윤리'다.

한국 사회는 윤금이 사건, 효순-미선 사건 등의 비극들을 경유하며 어떤 주장을 위해 피해자의 고통과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재현의 윤리를 공론장의 원칙으로 구성해 왔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더라도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과 사건의 폭력성을 날것 그대로 재현하는 과정이 바로 그 타인의 존재와 삶에 대한 수단화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의 없이 그 폭력적 재현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시민들에게도 불가항력의 고통을 전가하게 된다.

이 재현의 윤리는 저절로 형성된 게 아니라 여성 단체들의 지난한 노력과 저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반미 시위를 위해 훼손된 피해자 시신을 재현하는 게 뭐 어떻냐고 이준석처럼 억울해하던 그 낡은 상식에 맞서고 저항하면서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그 노력들 덕에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의 존재를 도구화하지 않고, 또 대중들에게 인지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재현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고도의 공적 담화가 수행되어야 하는 대선토론 자리에서 학대 수준의 언어폭력과 여성혐오를 전시함으로써 공론장을 위협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공들여 세공해왔던 재현의 윤리를 박살냈다. 종이처럼 가벼운 세치 혀로 갈라치기와 혐오선동을 일삼는 극우의 진면목을 가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말 그대로, 험한 것을 치웠더니 또 험한 것이 기어나오고 말았다.

▲정치하는엄마들의 대선 3차 TV토론 이준석 성범죄 발언 긴급 단체고발 기자회견. 사진=정치하는엄마들 페이스북

브레히트의 말처럼, 히틀러를 배양시킨 곳이 비옥하다면 계속해서 괴물이 출몰하게 된다. 윤석열을 파면시켜도 그를 낳은 토양이 굳건하다면 극우 세력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윤석열, 그리고 '40대 윤석열' 이준석을 배양시킨 토양이란 무엇인가.

윤석열의 황량한 정신 세계에 음모론을 주입했던 극우 유튜브인가? 이준석에게 여성-소수자 혐오를 일용할 양식으로 제공하는 펨코인가? 사실은 유튜브와 펨코 같은 극우 온상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능력, 그것이 훨씬 더 치명적이다.

그동안 승자독식의 능력주의와 성장주의를 끊임없이 닦달하면서도 차별금지법 하나 만들지 못한 채 혐오와 차별을 방치하며 민주주의를 부단히 침식시켜 온 한국 사회가 바로 극우의 토양이다. 차별과 혐오가 당연시되는 세계, 경제 성장만을 앞세운 채 민주적 제도와 공공성을 스스로 부식시킨 세계, 소수의 이익을 위해 불평등을 감수하라고 윽박지르는 바로 그 세계에서 윤석열과 이준석 같은 극우들이 줄지어 기어나오는 것이다.

극우 세력은 물론 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도 이 토양에 자양분을 제공해 온 게 사실이다. 이준석의 언어폭력에 화답하듯, 바로 뒤이어 유시민이 설난영씨를 비판한답시고 학벌을 앞세워 여성 노동자를 비하하며 논란을 자초한 것만 봐도 이 악취나는 혐오-차별에 여야 구분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돈만 많이 벌면 어떤 짓을 해도 되고, 권력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면죄가 되고, 학벌만 좋으면 다른 사람들을 깔아뭉개도 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당연히 선을 넘는 위반자들이 계속 출몰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 헌정질서를 찢고 공론장의 결계를 망가뜨리는 위반자들의 지속적 출몰은 변수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상수다.

그러니, 대선 승리가 곧 축포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 그것이 기어나온 곳은 여전히 비옥하다. 내란을 겪고나서도 여전히 '성장' 외에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차별과 불평등을 방치한다면 그곳은 더욱 비옥해진다. 설령 지금의 이준석이 퇴출된다 해도 다음날이면 또 다른 이준석이 문 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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