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면 5000만 원 임금 떼여도 일단 추방? '선 구제' 원칙 20년째 제자리
"구금·추방되면 사실상 돈 받을 방법 없다"
체불 사업주들, 일부러 경찰에 신고 악용도
'선 구제 후 조치' 대안, 20년째 감감무소식
"퇴직금 주고 추방, 업주 구속."
"퇴직금은 퇴직금이고, 불체(불법 체류)는 불체지. 퇴직금 주고 추방하면 됨."
1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5,000만 원 임금체불을 당해서 신고하러 갔다가, '불법 체류'를 이유로 체포돼 추방 위기에 내몰린 필리핀 출신 노동자 사건이 보도되자 댓글에 달린 반응들이다.
떼인 임금은 제대로 주되, 불법 체류에 대한 엄정 조치도 하라는 의견이 많지만 현행 체계상 "추방되고 나면 사실상 돈을 받을 방법은 없다"는 게 현장 시민단체들의 설명이다. 미등록(불법 체류) 노동자는 임금 체불을 당하고도 구금·추방 압박 탓에 구제를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20년 전 정부가 대책으로 내놓은 '선(先) 구제 후(後) 통보' 원칙도 아직까지 제도화되지 못했다.
구금 노동자 측 "사측 의도적 신고" 의심
22일 수원중부경찰서와 시민사회 등에 따르면 30대 필리핀 노동자 A씨는 지난 18일 오후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에 임금체불 피해자로서 회사 대표와 대질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불법 체류'로 체포돼 구금됐다. 경기 용인시 석재회사에서 10년간 일한 A씨는 지난해 11월 퇴사 후 퇴직금과 연차수당 약 5,000만 원을 못 받았다며 진정을 냈다. A씨 측에 따르면 대표는 조사 전 "고용청에 출석하지 말고 진정을 취하하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장시간 조사 후 귀가하던 A씨는, 청사 복도에서 회사 대표 아들인 B씨와 마주쳤고 시비가 붙으며 경찰이 출동했다. 출동한 경찰은 A씨 신원을 확인하던 중 비자 만료 사실을 확인해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수갑을 채워 현행범 체포했다. 처음에 신고된 다툼 문제는 폭행 등 혐의로 사건화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이후 밤늦게 A씨는 법무부 산하 수원출입국·외국인청으로 인계됐고, 현재까지 닷새째 보호실에 구금된 상태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01915520003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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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체불 사건 해결을 도와 온 고기복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 대표는 "노동 현장에서 발생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마지막 보루(고용청)에서 A씨는 권리를 찾기는커녕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임금체불 피해 외국인 노동자가 구금될 경우 조만간 추방되거나, 고용청 진정·재판 등 구제 절차에 관여하기 힘들다 보니 자포자기하고 자진 출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에 이주인권문화센터는 A씨에 대한 일시 보호 해제(석방) 및 임시 비자 발급을 촉구하고 있다.
A씨 임금체불 사건을 담당하는 고용부 경기지청 관계자는 "쟁점이 남은 부분에 대해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가 구금됐는데 조사가 가능하냐'는 질문에는 "조사가 필요하다면 (관계 당국에) 협조 요청을 해서라도 진행하겠다"고 했다.
당일 고용청 조사에 동행한 고 대표는, 경찰 신고가 이뤄진 경위가 석연찮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경찰에 따르면 신고자는 A씨도, 사측도, 고용청도 아닌 '제3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A씨가 B씨를 복도에서 마주친 시각은 청사 문이 닫힌 오후 6시 이후라서, 상황을 목격할 만한 다른 민원인이 없었다는 게 고 대표 설명이다. 그는 "B씨가 도리어 A씨 멱살을 잡고 거친 행동을 했다"며 B씨가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고, 다른 회사 관계자 등 지인을 시켜 신고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인권위 '통보 면제' 권고에도 법무부 잠잠
이주인권단체 등 시민사회에서는 '불법 체류' 사실을 알고도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들이, 임금체불 등 문제가 생기면 이를 약점 삼아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악용하는 문제가 오래전부터 빈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141045755434)
2021년 5월에도 태국인 노동자 4명이 퇴직금 등 7,000만 원 체불 신고를 하자, 사업주가 그중 한 불법 체류 노동자를 '절도 혐의'로 신고해 추방 위기에 몰렸다. 2022년 11월에도 1,000만 원 임금체불을 당한 미등록 베트남 노동자가 신고하자, 사업주가 '협박을 받았다'며 신고해 노동자가 구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기관들은 이미 20년 전부터, 미등록 노동자가 임금체불 등을 당한 경우 피해 구제부터 하고 이후 경찰이나 고용청이 출입국 담당 관계기관에 통보하도록 하는 대안을 내놓은 바 있지만 아직도 제도화되지 못했다. 2006년 2월 법무부는 '출입국관리행정 변화전략계획'으로, '선 구제 후 통보' 방식의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듬해 "공무원이 출입국 사범 발견 시 지체 없이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통보하도록 해서, 임금체불·사기 피해 외국인의 권리 구제에 현실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선 구제 후 통보' 제도를 법률에 명시하라고 권고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82009520004215)
인권위는 지난해 8월에도 임금체불 사건 등은 고용청의 통보 의무를 면제해주라고 권고했지만(법무부령 개정 사안), 법무부는 올해 1월 "임금체불은 금전적인 채권·채무에 불과해 인권 침해나 범죄 피해 구제가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며 수용하지 않았다.
최정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이주노동팀장(법무법인 원곡)은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면 임금체불을 당해도 누가 신고하겠냐"면서 "A씨는 출입국관리법 위반 피의자인 동시에 임금체불 피해자라는 '이중적 지위'에 있는 셈인데 체불 피해에 대한 회복과 지원을 우선하는 게 헌법적 가치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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