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완성한 시민들 “극우 막아낼 다양성 정치, 지금 하라”
이 기사는 “다양성과 차별 금지, 대선에서 사라져”에서 이어집니다.
서울대-남성-법조인으로 표상되는 윤석열 정부의 능력주의에 질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진은선씨는 ‘능력을 기준으로 줄 세우는 구조’를 타파하자고 제안한다. “저는 새로운 민주주의로 가는 방향에서 (장애인) 시설이 당연히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할 때 지금 사회가 생각 못하는 민주주의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그래서 이번 광장의 경험이 각자가 가진 소수자성을 더 많이 찾고 드러내고 연결하려던 시도라고 느낀 것 같아요.”
은선씨는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이유가 “정책이 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자본주의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가족이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은 다 (장애인) 시설로 가고 있잖아요. ‘효율적이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는 사회가 바뀌어야 시설이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으려면 장애, 젠더, 계급의 문제가 불평등한 사회구조 문제라는 걸 주요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긴급 의제’ 장애·젠더·계급·환경
일상 곳곳의 ‘민주주의 확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녹색연합 활동가 박수홍씨는 폐쇄적 행정 구조와 싸워왔다.“우리나라가 향후 15년간 전력을 얼마나 쓸지 정하는 ‘전력수급 기본계획’도 수립 과정이 굉장히 폐쇄적이고 불투명해요. 핵발전소도 지역민이나 발전소 노동자들이 발전소 폐쇄 계획을 전혀 모르고요. 민주적이라면, 투명하다면 그런 계획을 세울 때 충분히 공개하고 당사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수순이 필요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계엄 이후 달라진 민주주의 감각이 소통의 물꼬를 텄다.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취약한 고리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내걸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의미 있었어요. 사실 핵발전소든 석탄발전소든 그 발전 체계 안에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에 ‘부정의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계엄 이후 시민들의 민주주의 감수성이 엄청나게 올라와서 이런 이야기가 더 잘 전달된다고 느꼈어요. ‘이건 민주주의와 관련된 일’이라는 공감 포인트가 많았던 것 같아요.”
수홍씨는 탄핵 이후 “더 가열차게 싸워야 할 현실”을 알고 있다. “윤석열 파면 이전에는 서로 공감하고 정치권 내에서 메시지가 오갔지만 파면 이후엔 더 쉽지 않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광장 의제가 사라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선 국면에) 얻어낼 걸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입양과 가족 구성권, 당장 내 삶이다
광장은 기성 정치에 담기지 않은 낯선 언어가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기도 했다.전북 전주 시민 김서희씨는 전주 오픈마이크에서 입양당사자의 ‘알 권리’에 대해 발언했다. 생부·생모의 서류를 어렵게 손에 쥐었지만 10대 청소년이라는 정보뿐, 병력을 비롯한 어떠한 상세 정보도 없었던 탓이다. “주변에선 생부모 찾는 것도 말렸어요. 입양당사자의 관점에서 만든 정보도 없었고요.”
한국에서 쉬쉬하던 질문이 외국에선 이미 공적 담론이었다. 서희씨는 우연히 영국에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했다가 입양 홍보 부스를 맞닥뜨렸다. “부스 담당자가 아이를 입양할 자유와 가족을 자유롭게 구성할 권리를 말하면서 ‘당신도 입양 의사가 있냐’고 묻더라구요. 놀랐어요. 입양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근데 한국에선 왜 모두가 쉬쉬하고만 있지? 의문이 들었어요.”
일상-정치 연결 창구 더 많아야
광장의 오픈마이크처럼 일상과 정치를 연결하는 통로가 더 많아야 한다고 서희씨는 본다. “결국 정치란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니까, 결국 ‘이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알아야 실마리가 풀리니까요. 양당에 관한 이야기 말고 의제에 관해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해요. 일주일에 1~2명은 ‘나는 성소수자’라면서 벽장문 열고 나오고 1~2명은 ‘지금은 노동을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하는 자리요.”
서희씨는 광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양당 대립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전주도 토요일 광장은 무지개 깃발이 하나밖에 없고 모든 의제가 윤석열을 향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집회에 대응하는 카카오톡방도 윤석열 얘기가 아니면 나중에 하라는 식이었고요. 대선도 출마 뉴스 뜨는 걸 보면 죄다 민주당 아니면 국민의힘만 보도되더라고요. 아이고 머리야, 이렇게 결국 또 양당 얘기를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서희씨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선의 핵심 의제로 꼽았다. “다양성에 관한 정책을 펼쳤을 때 가해지는 혐오부터 막아야 그다음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당장에 제가 입양당사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걸 말했을 때 부정적인 말들이 따라오니까 입을 다무는 거잖아요. 결국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혐오를 차단해야 거기서부터 가족 구성권이든, 입양 의제든 풀어낼 수 있다고 봐요.”
기성 정치와 시민 만나는 제도적 창구
자신을 ‘아동학대 생존자’로 소개하는 권미리(23)씨도 기성 정치와 시민이 만나는 제도적 창구를 강조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비상행동이나 여러 시민단체와 식사 자리라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국회든 어디든, (시민들의) 얘기를 들으라는 거죠. 요즘은 SNS도 발달돼 있으니까 정부 차원에서 모니터링하는 방법도 있겠고요.”
오픈마이크는 낯선 정치 의제의 전초기지였다.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었고 “지역 광장에서 이야기되지 못한 주제를 말하는 공간”이었다. 광장의 목소리를 모아 비상행동이 펴낸 ‘사회대개혁 과제 자료집’에도 “광장의 시민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우리’였다. 지옥 같은 각자도생을 넘어 공동체를 복원하고 사회를 다시 만들자는 목소리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저마다의 생생한 언어로 빚어낸 의제들을 기성 정치인들은 도무지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미 낡아버린 의제만이 공약이 된다. 서희씨는 그런 ‘나이브함’ 역시 정치인이 듣기로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치인들이 계속 복잡한 언어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어화되지도 않은 것들이 문제라고 나오는데, 정치인이면 그걸 들으라고 하는 것밖에 답이 없지 않겠어요.”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류석우 기자 rainta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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