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의 ‘대통령 놀이’, 헌재가 일단 막아놨지만···
‘내란의 잔불’은 꺼지지 않았다. 윤석열 탄핵 인용 불과 나흘 만에 대한민국 헌법은 또 한 번 위기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4월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4월18일 임기가 종료되는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관 후임자를 기습 지명했다. 두 사람은 ‘대통령 몫’ 지명자인 만큼 당장 월권 논란이 일었다. 대선이 6월3일로 확정된 상황에서 이는 차기 대통령의 임명권을 빼앗는 일이기도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해야 한다(지난해 12월26일 대국민담화)”라는 한 권한대행의 기존 입장과도 배치된다.
한 권한대행이 지명한 두 명은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다. 특히 윤석열의 46년 지기로 알려진 이완규 법제처장은 12·3 불법 계엄 가담 의혹으로 공수처에 고발된 인물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내란 이후 법적 대응을 논의한 자리로 추정되는 지난해 12월4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 ‘안가 회동’ 4인(박성재 법무부 장관·이상민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김주현 대통령실 민정수석비서관·이완규 법제처장)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또 윤석열 검찰총장 재직 당시 징계 처분 취소소송을 대리했고, 윤석열의 장모 최은순씨를 변호하기도 했다.
6년 임기인 헌법재판관 9명은 대통령·국회·대법원이 각 3명씩 지명해 구성된다. ‘국회 몫’인 마은혁 헌법재판관이 임명까지 104일이나 걸린 것은 한덕수·최상목 두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야 합의’를 이유로 임명하지 않은 탓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위헌이라고 못 박았지만, 권한대행은 4월8일까지 ‘버텼다’. 이전까지 국회와 대법원 몫 지명자에 대해 대통령 혹은 권한대행이 임명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또 대통령 몫을 권한대행이 임명한 사례도 당연히 전무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도 ‘법 기술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헌법과 법률 해킹을 시도하고 있다.
애초 두 헌법학자의 대담은 윤석열 탄핵 선고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계획됐다. “이제 일 좀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4월9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로스쿨 연구실에서 만난 이황희 교수는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출신이다. 박근혜 탄핵심판 당시 헌재 내부 TF에 참석하기도 했다. 12·3 불법 계엄 이후 헌법학자들이 조직한 임시단체인 ‘헌정회복을 위한 헌법학자회의’ 간사로도 일하고 있다. 이범준 서울대 법학연구소 연구원은 사법 전문기자 출신으로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를 쓴 논픽션 작가다. 15년 전 취재원과 기자로 만난 두 사람이 헌법을 공부하는 동료가 되어 끝나지 않은 헌법의 위기를 진단했다.
이범준: 한덕수 권한대행이 4월8일 대통령 몫 재판관 임명을 시도했다. 헌법재판소 역사를 기록해온 사람으로서 선례의 중요성을 느끼는데, 2017년 황교안 권한대행이 대법원장 몫인 이선애 재판관을 임명하고, 대통령 몫인 박한철 소장 후임을 임명하지 않은 일이 헌법재판소 구성에서 헌법 원리를 확인한 것 아니었나.
이황희: 대통령 권한대행의 범위에 대해 법이 규정해놓은 바가 없다. 황교안 권한대행의 경우가 있지만, 많이 축적된 선례가 아니라 확립되었다고 이야기하기에도 어려운 면이 있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그런 맹점을 파고들었다. 다만 무엇이 ‘순리’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감각은 있다고 본다. 황교안 때와 달리 이번에는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범준: 한덕수의 행위는 일반적인 헌법 해석과 선례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정치적 목적으로 헌법을 훼손하는 시도는 아닐까?
이황희: 의도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다. 4월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탄핵 결정에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력이 아니라 정치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것이 자제, 존중, 관용, 타협이다. 이 결정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헌재 결정과 배치되는 상황이 발생해서 정말 유감스럽다. 특히 60일 이내에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 상황에서 임시적 지위를 갖는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의 재판관을 임명한다는 건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도 논란이 된다.
이범준: 한덕수 권한대행의 임명 시도를 막을 방법을 두고 권한쟁의, 헌법소원, 가처분 등 여러 논의가 있다. 그런데 이 역시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까지 대처할 방법이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소송이 구성될까?
이황희: 쉽지 않다. 가장 큰 권한 침해를 받는 피해자는 다음 대통령인데 현재 다음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송 주체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식인 국회의 인사 청문 권한 침해나 개인의 헌법소원으로 접근하지만, 성공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법정에서 결정 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부당하다고 느낀다. 우리 사회에 주어진 규범이 있는데, 처벌받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되나? 한덕수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무엇이었나. 위법·위헌적인 행위는 했지만 중대하지 않아서 직을 파면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무엇인가. 위법·위헌적인 행위를 했다는 거다. 파면되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헌재에서 결론이 나기 전이면 다 해도 되나? 그렇지 않다. 민주국가의 총리라면, 곧 선출될 다음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8년 전 황교안 총리도 그렇게 했다.
4월8일 한덕수 권한대행의 재판관 지명 직후 이완규·함상훈 임명을 막기 위해 헌법, 형법, 헌법재판소법, 국회법 등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조치가 시작됐다. 비상계엄 포고령 1호가 위헌이라며 지난해 12월9일 헌법소원을 제기한 김정환 변호사는 두 헌법재판관이 임명될 경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을 수 있는 당사자’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동시에 한 권한대행의 재판관 지명 및 인사청문 요청안 제출 등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도 신청했다. 김경호 변호사는 4월8일 한 권한대행을 직권남용죄로 공수처에 고발했다. 헌법재판소는 4월10일 무작위 전자배당 방식을 통해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 관련 사건 5건을 마은혁 재판관에게 배당했다.
이범준: 헌재에서 마은혁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위헌이라고 했는데, 이를 뭉갰지만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다. 한덕수는 그 틈을 계속 이용하고 있다.
이황희: 헌법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렇게 헌법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맞게 왜곡하는 행위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것 같다. 지금까지 재판관 임명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정 필요성이나 논의도 없었다. 독일의 경우 상원과 하원이 재판관을 반씩 임명한다. 예를 들어 한 기관이 임명을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임명 권한이 다른 기관으로 넘어가도록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적어도 기능적으로 보완하는 장치는 둘 수 있다. 우리도 후임 재판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둠으로써 헌법이 정치세력의 당리당략에 왜곡되지 않게 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이범준: 한편으로 헌법은 최후 단계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고, 그 전 단계에서는 한 사회의 정치구조가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가치를 공유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으로 헌법의 규범력을 강하게 만든다. 세세하게 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황희: 악용하기로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정치세력에 대한 대비책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속수무책 당한다. 기본적으로는 국민들이 헌법을 따르지 않는 세력을 심판하는 상황에서 헌법의 규범력이 최종적으로 확보된다. 하지만 선거는 4~5년에 한 번씩 열리고, 그사이 헌법 위반 행위에 어떤 식으로 우리가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선 법이 보완책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재판관 공석 문제와 관련해서도 제도를 두고 있으면 이번보다 어려움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범준: 헌법 위기 상황에서 법을 고치거나 개헌을 하는 건 다음 단계이고, 당장 인사청문회법 제6조에 따라 청문회를 하지 않고, 따라서 임명 가능한 20일이 시작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 한덕수의 위법행위를 또 다른 위법행위로 대처하는 것은 아닌가. 이후 ‘정당한’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상대 정당이 악용할 수 있지 않나.
이황희: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이범준이 이황희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인사청문 요청서를 국회에 보내면 국회가 받나? 받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이범준이 ‘무권리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임명할 수 있는 권리자다. 이범준이 보낸 것이나 한덕수가 보낸 것이나 차이가 없다. 인사 요청자가 권한이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형식적인 심사, 한번 따져보겠다는 게 국회의 뜻인 거고 이게 남용될 우려는 없다고 본다.
윤석열 탄핵 인용 직후 개헌 논의를 시작했던 우원식 국회의장은 개헌 논의를 포기하며, 한 권한대행의 사과와 지명 철회를 요구했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4월10일 한 권한대행의 후보자 지명을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 위헌·위법이라는 의견이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압도적”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만큼, 인사청문 요청서가 오는 대로 청문 절차를 거부하고 권한쟁의심판과 가처분을 청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청문회법상 국회는 20일 안에 인사청문 절차를 마쳐야 하며, 청문 기간은 열흘 연장할 수 있다. 30일이 지나면 대통령은 지명자를 임명할 수 있다. 권한대행의 임명 가능 여부는 또다시 헌재의 손에 맡겨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이범준: 윤석열 탄핵 선고가 늦어지는 동안 한덕수가 4월18일 임기가 끝나는 재판관 공석 두 자리를 임명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가 나오지 않았나. 마은혁을 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심의 정족수(6명)를 맞춘다는 핑계로 임명을 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었다. 그런데 탄핵 선고가 나면서 그런 상황이 해소됐는데, 한덕수가 과감하게 나왔다. 오랫동안 기획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황희: 오랫동안 기획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사라는 게 금방 이뤄지는 게 아니고 항상 준비 과정이 있다. 그런 면에서 오래 준비해온 인사로 본다. 아마 4월18일까지 선고가 나지 않았으면 이 두 사람(이완규·함상훈)을 임명하고자 했을 것 같다. 이번에 많이 느낀 것 중 하나가 권한대행 순서를 손봐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박근혜 탄핵 때만 해도 개인 비리 문제였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무위원들이 다 줄줄이 연루돼 있다.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견제할 방법이 없다.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은 정치적으로 평가나,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국회의장은 직접적으로 심판을 받는다. 만약 개헌이 되면 권한대행 순서를 다시 정하는 걸 손보면 좋겠다 싶다. 국회의장이 권한대행 순서에 들어가 있었다면 마은혁 케이스도 이완규·함상훈 케이스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았겠나.
이범준: 헌법이 생긴 지 내후년이면 40년이다. 그사이에 우리가 민주화도 이루고, 선진국도 됐다. 선진국이 된 여러 기준 중 하나는 헌법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법을 없애라고 하면 없어지고 탄핵하면 물러났다. 윤석열과 한덕수 이전에는. 헌법의 약점이라는 것도, 헌법의 결함이라기보다는 헌법을 이렇게까지 악용할 세력이 나타날 것을 예상 못했다는 것에 가깝다. 왜 2025년에 이런 일이 뒤늦게 벌어진 걸까.
이황희: 헌법을 위반했을 때 발생하는 정당성의 위기가 있다. 국민 지지가 줄어들고 선거에서 진다. 국민이 ‘그런 정당 필요 없다’고 하는데 어떤 정치인이 이렇게 나올 수 있나. 많은 선진국 민주국가에서 헌법을 준수하는 이유다. 결국 헌법을 잘 준수하는 정부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국민의 정치적 열망만이 헌법의 최후 방벽이다. 그런데 정치 양극화가 심해지면 내가 헌법을 위반하더라도 ‘우리 편’의 지지가 흩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정치 양극화로 스윙보터가 사라지면, 내가 헌법을 어기더라도 정당성의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헌법을 지킬 이유가 없는 거다. 결국 정치 양극화가 윤석열·한덕수 현상을 만들어내는 큰 원인이라고 본다.
이범준: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야당과 여당의 대립이다. 이는 상수인데, 윤석열은 폭력을 사용해 풀려고 했다.
이황희: 정치 양극화 문제는 문화적인 부분이라 제도로 고치기 쉽지 않다. 다만 제도로 완화하는 노력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양당 체제에서는 내가 잘하는 것보다 남이 못하는 게 훨씬 쉽고 이득이다. 그러다 보니 수사권을 동원한다. 전 정권의 잘못이 드러나면 집권의 정당성이 생기고 인기가 올라간다. 이게 다당제에서는 불가능하다. 내가 더 나은 세력이라는 걸 포지티브한 방식으로 보여줘야 한다. 독일의 경우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헌법을 만들었는데, 특정 정당이 국회 의석 50%를 넘은 건 딱 한 번이다. 항상 연합을 해야만 국회에서 다수의 의사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거대 양당도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서 합의할 수 있는 정책들을 발굴해야 한다. 기후위기나 고령화 저출산 같은 당면한 문제들, 가치관 대립이 덜하고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문제를 정치가 유능하게 해결함으로써 국민들이 정치의 효용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는 게 더 많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범준: 개헌 문제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역대 국회의장들이 모두 한 번씩 해보고 싶어 하는 이슈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헌법보다 더 좋은 헌법이 필요하다거나, 지금 헌법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는 단계가 됐다는 주장이 있다.
이황희: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전성기를 이끈 헌법이다. 민주화, 인권신장, 경제성장 다 이 헌법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박근혜·윤석열 사건은 헌법을 위반해서 생긴 일이고, 그 위반을 교정하는 과정은 우리 헌법이 예정한 질서 내에서 이뤄졌다. 그런 면에서 정치의 잘못을 헌법의 잘못으로 다 돌리는 것은 일단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40년이 되어가기 때문에 개정하고 손질할 필요는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개정으로 본다. 급하게 할 건 아니다. 정치권 주도로 시작해서 완결하기보다 국민 뜻을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이범준: 개헌 외의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황희: 대통령제가 인사권이 워낙 비대하고 집중돼 있다. 정권 초기에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고, 정권 말기에는 레임덕이 온다. 인사권을 분산시키고 권력기관을 정치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헌법 개정보다 법률 개정 차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헌법은 국가에 적용되어 권력을 통제한다. 헌법은 국민의 대표가 만든 법률을 폐지하고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파면한다. 거칠게 보면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것이지만 정확히는 민주주의를 보완하여 완성하는 것이다(〈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태어난 헌법재판소는 지난 40여 년간 법의 한계를 계속 넓혀왔다. 헌법은 품이 넓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다. 그 덕분에 바뀐 시대의 변화를 ‘법에 따라’ 뒤늦게나마 반영할 여지가 생긴다. 특히 법정 의견이 되지 못한 헌법재판관의 소수의견의 경우, 미래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된다. 헌재의 위상 역시 거기에서 나온다. 동시에 헌법재판소의 사무 중 하나인 탄핵심판은 징계 재판이다.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법적 책임을 묻는다. 이는 때로 헌법재판소를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위태롭게 만든다.
이범준: 윤석열 탄핵심판이 8대 0전원일치로 인용되면서 탄핵을 반대했던 세력이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이황희: 전원일치였던 것이 의미 있다. 정치적 성향을 초월한 보편적인 합의와 판단을 형식적으로 보여준 거다.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 있음에도 반대의견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의미다. 정치적 사건일수록 하나의 의견을 밝히려고 했다는 노력에서도 의미 있다. 물론 이런 ‘사법형 모델’이 갖는 단점이 있다. 국민 상식에서 유리된 소수 엘리트 법관의 판단이라는 비판이다. 얼마든지 보완 가능하다. 이탈리아의 경우 대통령 탄핵심판은 재판관 15인에 국민 추첨 16인을 넣어 31인이 재판하게 돼 있다. 기본적으로 재판소 방식을 유지하면서 국민 상식을 반영하기 위한 제도적 설계도 가능하다.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델의 장단점을 비교해서 결정할 문제다.
이범준: 이번 탄핵 심판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다시 높아졌지만, 헌법재판소가 이러한 사건을 제대로 다루는 것인지 걱정되는 순간도 여럿 있었다. 헌법재판소 사무 중에서 특히 탄핵심판과 권한쟁의심판은 정치적 분쟁의 수단으로 쓰인다. 개헌 상황을 전제로 하지만, 헌재가 관장하는 사무 중 이 두 가지를 계속하는 게 옳을까.
이황희: 기본적으로 헌법의 역할은 정치를 규율하는 거다. 권한쟁의나 탄핵심판은 헌법재판소가 충분히 할 수 있고, 원래 해야 할 일인 것도 맞다. 그럼에도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고, 무엇을 택할 때는 어떤 단점을 감수할까의 문제라서 충분히 논의해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범준: 내가 배워온 상식으로는 8대 0전원일치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5대 3 교착설’이 나왔을 때 신뢰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국민들이 이 사건에서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헌법재판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민형사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3000명 정도 있는데, 우리가 다 알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내 인생을 결정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런데 헌법재판관 9명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나와 상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라도 임명 시스템은 손을 봐야 한다.
이황희: 재판은 재판관이 하는 것이니까 장담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한순간도 인용을 의심한 적은 없고, 8대0을 가장 유력하게 전망했다. 박근혜 때와 비교해보면 개인의 부정부패 사건이지만, 윤석열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국회에 군을 투입한 사건이다.
이범준: 윤석열 탄핵 결정문은 근래 헌법재판소가 내고 있는 결정문 중에서도 드물게 잘 나왔다. 한덕수 탄핵 결정문과 비교해보면 특히 그렇다.
이황희:한덕수 사건은 추측이지만 좀 바빴던 것 같다(웃음). 윤석열 사건과 한덕수 사건이 같은 재판부 아닌가. 이 결정문이 장래에 의미를 가질 텐데 가장 큰 핵심은 갈등과 의견 대립을 힘이 아니라 정치로 해결하라는 거다. 그리고 헌재가 시민들의 역할을 짚어줬다. 윤석열이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했을 때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권 행사로 맞섰는데, 그 과정에서 시민이 국회를 보호했고 또 군경이 소극적 임무 수행으로 시민을 보호했다는 대목이다. 저 역시 한국 사회 민주주의 역사에서 위대한 장면이라 생각하고, 다음에 유사한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남겼다는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범준: 윤석열 결정문을 보면 윤석열의 행위가 위헌·위법이라는 것을 논증하면서 주요 논거로 헌정사를 들고 있다. 선관위 독립성 침해에 관해서는 3·15 부정선거 이후 선관위가 행정부에서 떨어져 독립기구가 된 역사를 들고, 국군의 정치적 중립 훼손에서는 12·12 쿠데타를 드는 식이다. 우리 헌법재판도 40년이 다 되어가면서 미국 판례처럼 역사를 쓰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황희: 기본적으로 전 세계 헌법은 유사하다.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공히 추구하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을 동일하게 보장한다. 그러나 같은 조문이어도 각국마다 보장하는 수준은 모두 다르다. 국민들의 인식이 다르고 정치·문화·사회 관행이 다 다르기 때문인데, 왜 차이가 날까? 역사 때문이다. 그 사회가 어떤 역사적인 흐름과 맥락을 가졌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이 정치에 갖는 견해와 관행이 다른 거다. 다시 말해 동일한 헌법 조항이라 하더라도 그게 실현되는 방식은 다 차이가 난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배경이 그 사회의 역사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 헌재가 이번에 역사 속에서 헌법이 구체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인식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12·3 계엄의 경우에도 그 사건 당일에 그 사건만 놓고 보는 것과 헌정사에서 반복된 친위 쿠데타의 연속성 속에서 보는 건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비상계엄에 관해 우리는 흑역사가 있다.
이범준: 탄핵 선고가 늘어지면서 헌재 무용론도 많이 나왔다. 숫자로 설명해보겠다. 일본 최고재판소와 한국 헌법재판소가 법률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린 게 일본은 13건, 한국은 956건이다. 우리도 대법원 헌법위원회 시절에는 다 해서 딱 세 건 있었다. 헌법재판소를 없앴을 때 탄핵을 떠나서 이런 기본권 보장이 제대로 될 것인지, 그 점이 매우 의심스럽다.
이황희: 헌법은 정치를 규율하는데, 이 규율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규율이다. 틀을 정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윤곽규범적(헌법 규정이 모호하거나 흠결이 있을 때, 하위 체계인 법률과 법규범을 통해 구체화)이다. 악용하려고 하면, 다시 말해 공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 자체를 헌법재판소가 판단해주는 거다. 헌법재판은 헌법재판소의 유일한 업무이기 때문에 부실하게 하면 당장 폐지론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 방식을 취하는 국가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인권 보장의 역할을 해왔다.
※〈시사IN〉 기사가 지면으로 발행된 후인 4월16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가처분을 인용했다. 한덕수 권한대행의 재판관 지명 효력은 일시정지됐다. 헌재는 인사청문요청안 제출 등 일체의 임명 절차도 진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범준 연구원은 이에 대해 “단순히 재판관 두 명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 한덕수 권한대행이 앞으로 대선일까지 대행이 할 수 없는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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